[다산칼럼] 사생결단, 이제는 그만 ‥ 洪準亨 <서울대 교수ㆍ공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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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자살 사수 결사항전, 언제부턴가 이런 일들이 예사가 돼버린 것 같다.
어느 농민운동가는 한국농업 사수를 외치며 WTO 행사 개최지에서 할복자살을 결행했고, 노동자 재벌총수 대기업수뇌 고위공직자, 심지어는 생활고에 지친 주부들이 피맺힌 절규를 남기고 철탑과 고층빌딩 아래로, 한강다리 밑으로 투신자살을 했다.
그러고 보면 단식투쟁은 약과고, 일상다반사가 돼버렸다.
흔히 자결 문화는 한국보다는 일본 것, 일본적 현상이라 했던 것인데 어째서 우리가 막다른 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의 습속에 익숙해진 것일까.
물론 그런 행태를 어느 한 나라의 특유한 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마니 풀리테로 유명 정치인의 자살이 이어졌던 이탈리아 같은 사례를 그 나라 특유의 현상이라 말하진 않을 것이다.
난공불락 같았던 독재정권의 폭압에 죽음으로 맞섰던 열사들의 행렬도 꼭 우리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더욱이 오래 기억되는 자결행위들은 대부분 숭고한 뜻을 가진 자기희생이었다.
야만적 식민지통치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 당랑거철의 용기로 독재와 폭압의 정치적 질곡에 저항하다 꽃다운 목숨을 버린 민주투사들의 살신성인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세상을 경악시켰던 일련의 자살사건들의 면면을 되씹어 보면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절망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실현불가능한, 아니 도저히 실현될 것 같지 않은 요구나 소망의 절대화ㆍ극단화의 결과 자해행위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애당초 타협이나 대안의 여지를 배제했기 때문에 그 숭고한 뜻에 대한 공감보다는 왜 꼭 그래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과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결과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기게 마련이다.
자살에 이르는 병을 제3자가 어찌 이해하며 또 막을 수 있는가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회적 의미를 지닌 자살, 사생결단의 대다수는 토론과 타협, 대안의 여지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폐색시킨 데서 비롯된 귀결이다.
개인적 수준에서 갈등관리 미숙이나 아예 갈등을 파국으로 몰아가 버리는 과격한 조급증이 사회적 수준에서 투신자살이라는 사생결단의 행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독 우리나라에 특유한 점은 비타협적 대결의식과 자결식 해법이 구조적으로 결합된 사생결단의 문화가 너무 오래, 끈질기게 전이돼 사회의 건강 자체를 위협하는데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갈등중독에 걸린 국민은 피곤하다.
탄핵문제를 넘었고 이라크 파병갈등도 잠시 피해갔지만 신행정수도 건설갈등이 심상치 않다.
감당키 곤란한 국론분열로 치닫는 형국이다.
친일파, 반민주 행위자 등 과거사 청산문제가 끓기 시작한다.
경기는 살아나지 않는데 경제위기니 아니니 정략적 논란으로 날새는 줄 모르는 정치권을 보며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절망하다 못해 분노하고 증오한다.
이제 사생결단식 해법으론 사회구성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된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자.
근시안적 실용주의라 비난하겠지만, 집단사고에 빠지기 쉬운건 투사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국민은 지금쯤 임전무퇴의 투사보다는 자기주장을 펴며 열심히 분투하다가도 멋지게 질줄 아는 사람, 설령 자신이 옳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해 한발 물러서기도 하는 모습을 고대한다.
반면 평소 합리적 토론에 응하다 일단 소속 단체나 기관으로 돌아가서는 정색을 하고 명분과 입장의 철가면을 뒤집어쓰는 위선, 상대방이 그 주장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면서도 자신만은 절대 진실을 고수하겠다는 자기파괴적 독선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어리석은 자 결국 나와 우리가 아닌가.
더러 질 수도, 하필 지는 쪽이 자기일 수도 있고 물러설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게 인생일진대 갈등해결의 지혜란 것도 반드시 유별난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사생결단으로 고집하는 자신이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 결국 상대방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 모르니 불쌍하게 여기는 것, 서로 죽기를 바라지 아니하고 죽이지 아니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들이 입만 떼면 읊조리던 상생의 참뜻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어느 농민운동가는 한국농업 사수를 외치며 WTO 행사 개최지에서 할복자살을 결행했고, 노동자 재벌총수 대기업수뇌 고위공직자, 심지어는 생활고에 지친 주부들이 피맺힌 절규를 남기고 철탑과 고층빌딩 아래로, 한강다리 밑으로 투신자살을 했다.
그러고 보면 단식투쟁은 약과고, 일상다반사가 돼버렸다.
흔히 자결 문화는 한국보다는 일본 것, 일본적 현상이라 했던 것인데 어째서 우리가 막다른 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의 습속에 익숙해진 것일까.
물론 그런 행태를 어느 한 나라의 특유한 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마니 풀리테로 유명 정치인의 자살이 이어졌던 이탈리아 같은 사례를 그 나라 특유의 현상이라 말하진 않을 것이다.
난공불락 같았던 독재정권의 폭압에 죽음으로 맞섰던 열사들의 행렬도 꼭 우리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더욱이 오래 기억되는 자결행위들은 대부분 숭고한 뜻을 가진 자기희생이었다.
야만적 식민지통치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 당랑거철의 용기로 독재와 폭압의 정치적 질곡에 저항하다 꽃다운 목숨을 버린 민주투사들의 살신성인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세상을 경악시켰던 일련의 자살사건들의 면면을 되씹어 보면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절망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실현불가능한, 아니 도저히 실현될 것 같지 않은 요구나 소망의 절대화ㆍ극단화의 결과 자해행위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애당초 타협이나 대안의 여지를 배제했기 때문에 그 숭고한 뜻에 대한 공감보다는 왜 꼭 그래야만 했는가 하는 의문과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결과에 대한 안타까움을 남기게 마련이다.
자살에 이르는 병을 제3자가 어찌 이해하며 또 막을 수 있는가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회적 의미를 지닌 자살, 사생결단의 대다수는 토론과 타협, 대안의 여지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폐색시킨 데서 비롯된 귀결이다.
개인적 수준에서 갈등관리 미숙이나 아예 갈등을 파국으로 몰아가 버리는 과격한 조급증이 사회적 수준에서 투신자살이라는 사생결단의 행태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독 우리나라에 특유한 점은 비타협적 대결의식과 자결식 해법이 구조적으로 결합된 사생결단의 문화가 너무 오래, 끈질기게 전이돼 사회의 건강 자체를 위협하는데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갈등중독에 걸린 국민은 피곤하다.
탄핵문제를 넘었고 이라크 파병갈등도 잠시 피해갔지만 신행정수도 건설갈등이 심상치 않다.
감당키 곤란한 국론분열로 치닫는 형국이다.
친일파, 반민주 행위자 등 과거사 청산문제가 끓기 시작한다.
경기는 살아나지 않는데 경제위기니 아니니 정략적 논란으로 날새는 줄 모르는 정치권을 보며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절망하다 못해 분노하고 증오한다.
이제 사생결단식 해법으론 사회구성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된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자.
근시안적 실용주의라 비난하겠지만, 집단사고에 빠지기 쉬운건 투사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국민은 지금쯤 임전무퇴의 투사보다는 자기주장을 펴며 열심히 분투하다가도 멋지게 질줄 아는 사람, 설령 자신이 옳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해 한발 물러서기도 하는 모습을 고대한다.
반면 평소 합리적 토론에 응하다 일단 소속 단체나 기관으로 돌아가서는 정색을 하고 명분과 입장의 철가면을 뒤집어쓰는 위선, 상대방이 그 주장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면서도 자신만은 절대 진실을 고수하겠다는 자기파괴적 독선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어리석은 자 결국 나와 우리가 아닌가.
더러 질 수도, 하필 지는 쪽이 자기일 수도 있고 물러설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게 인생일진대 갈등해결의 지혜란 것도 반드시 유별난 깨달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사생결단으로 고집하는 자신이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 결국 상대방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지 모르니 불쌍하게 여기는 것, 서로 죽기를 바라지 아니하고 죽이지 아니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들이 입만 떼면 읊조리던 상생의 참뜻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