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을 공격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얼마전 신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수도이전 반대는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내지 퇴진운동으로 느낀다"고 했는가 하면, 엊그제는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 진상위를 공격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을 개인적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금은 "국가가 바로 나"라고 외쳤던 루이 14세의 시대가 아니니, 누구도 "정부가 바로 나"라고 외칠 수 없다.

따라서 정부에 대한 비판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없다.

물론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과 집권층이 다른 일반사람들보다 훨씬 혹독한 비판과 검증의 시험대에 서는 것은 민주사회의 특징이다.

정부의 정책결정은 한번 내려지면 그 자체로 현세대의 국민뿐 아니라 미래의 세대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중차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콩으로 메주를 쑤겠다"는 정부의 정책에까지 토를 달 필요는 없다.

하나 태산을 옮기겠다는 일만큼 엄청나고 새로운 포부를 밝히며 사업을 벌일 때는 사정이 다르다.

국민들은 현미경으로 일일이 검증해가며 때로는 사오정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등, '악마의 대변자역'을 자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물음을 던져본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도 벅찬데, 왜 역사학도들에게 맡겨도 충분한 과거사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목을 매는가. "서울에서 살렵니다"로 끝나는 '서울찬가'가 버젓이 있는데,갑자기 멕시코시티나 베이징보다 못한 "서울을 떠나렵니다"로 시작하는 '서울비가'를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작곡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주정치에서 비판의 금도를 새삼 생각해본다.

대선에서 승리한 집권세력에 대해 비판을 한다면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태도일까.

또 비판이란 대통령 대접을 하지않으려는 사람만이 취하는 태도일까. 이미 참여정부는 초기에 "국민이 대통령"이란 인상적 홍보문구를 창안해냈다.

이때의 '대통령'이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대통령처럼 수많은 국민들이 통치권을 행사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다만 "대통령은 국민의 심부름꾼"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국민의 공복"이란 느낌을 갖게 될 때는 언제일까. 용비어천가를 부를 때인가, 아니면 비판과 쓴소리를 할 수 있을 때인가. 사람들이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정부를 비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여의 의미가 빛날 것이다.

비판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정부가 있다면, 두가지 가운데 하나다.

잘못이나 시행착오가 없는 완벽한 정부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판을 억누르거나 윽박지르는 권위주의 성향의 정부다.

참여정부는 어떤 범주일까.

완벽한 정부라기보다는 불완전한 정부일터이다.

그럼에도 '더 불완전한' 정부에서 '덜 불완전한' 정부로 발돋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일까.

그렇다면 비판의 언로를 활짝 열어놓는 것이 정도다.

정부가 야심차게 추구하려는 국정 아젠다에 대해 공격이 들어올까봐 겁내고 대통령이 앞장서서 그 비판을 '비판'하려 한다면, 어떻게 국정이 개선될 수 있을까.

국정개혁은 수많은 혁신위원회를 만든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비판을 겸허하게 경청할 때 이뤄진다.

비판을 두려워하는 정부는 '열린 정부'가 아니라 '닫힌 정부'다.

'열린'우리당을 여당으로 갖고 있는 정부는 비판이 국정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국정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민주정부는 비판을 받기 위해 있는 정부이다.

마치 축구팀의 골키퍼는 항상 상대편으로부터 공격을 각오해야 하듯이 정치권력을 가진 집단도 같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집권세력이 공격을 받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면서 부덕의 소치로 치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다. 또하나는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면서 비판의 목소리에 온힘을 다해 '칼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전자는 겸손한 정부고 후자는 오만한 정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개혁을 부르짖는 오만한 정부'가 아니라 '비판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정부'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