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점심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모 출판사 사장의 전화였다.

효자동 재래시장 막걸리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일은 안 하고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고 핀잔을 주었더니 일하면 오히려 손해인데 뭐 열심히 일하느냐,막걸리나 한 잔 하고 속이나 달래자는 것이었다.

술판에 갔더니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서너명의 출판사 사장이 모여 신세 한탄을 하고 있었다.

10년여 이상 출판사를 경영한 한 분은 이렇게 어렵기는 처음이라는 말을 했다.

불황이면 불황일 수록 더 열심히 기획하고,필자를 찾고,마케팅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데 백약이 무효라 어떤 방법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불황기에는 그 시기에 맞는 책이 있었다.

IMF 구제금융 시절엔 '아버지'가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돌아보니 아무 것 없는 불쌍한 개발세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소설인데 2백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물론 요즘도 쏠쏠하게 팔리는 책들이 있다.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 같은 책이 지금 같은 불황에 딱 맞는 트렌드라고 할수 있다. 사실 서민들에게 5천원으로 손님상을 차리고 1천원으로 국이나 찌개를 만들 수 있다면 솔깃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책의 기획에는 분명 한계가 있고,모든 출판사가 그런 책만을 낼 수도 없다.

그런 특수한 책이 아니면 낼수록 손해라,차라리 몇 푼 추렴해서 막걸리나 마시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고 경제적으로도 이익이니 부어라 마셔라가 당연지사 아닌가.

그렇다.

요즘 같은 때는 책을 안 내는 것이 오히려 이익일 때가 많다.

2천∼3천부 소화하기 힘드니 무엇 때문에 열심히 책을 만들겠는가.

그렇다고 인건비를 비롯한 경상비는 늘 지출되므로 사실 책을 안 내도 손해는 마찬가지다.

책을 내도 손해 안 내도 손해,진퇴양난,사면초가다.

사정이 이러니 다수 출판사 사장들의 가슴은 시꺼멓게 타들어 간다.

책을 읽자는 캠페인을 하고 독서 진흥에 관한 여러 가지 묘안을 짜내도 결국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그 술자리에서 나온 탄식 중의 하나는 신문이나 언론 매체에 책이 소개돼도 독자들의 반응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출판업자들끼리의 용어로 신문발,광고발이 안 먹힌다는 것인데 이러니 책의 홍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책이 안 팔린다고 탄식하며 여기저기에 칼럼을 쓰곤 했는데,그 글들을 읽어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출판산업은 문화사업이며 지식산업이기에 반드시 육성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도서관에서 책을 구입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도서관에서 책을 구매하지만 그 양은 터무니없이 적다.

2천부 정도 팔리면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으니까 좋은 책은 공공도서관 등에서 2천부 정도를 소화할 수 있게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안도 좋지만 좀더 획기적인 방법이 없을까.

한 출판사 사장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책을 사지 않으니,그리고 읽지도 않으니,책을 사면 세금공제 혜택을 줄 수 있게 해보자.예컨대 갑이라는 사람이 1년에 30만원에 해당하는 책을 샀다면 연말에 그 영수증을 제출해서 세금공제 혜택을 받게 한다면 갑은 책을 구매할 거라는 말이다.

나아가 기업도 책을 구매하면 감세 혜택을 줄 수 있게 하자.그러면 추석이나 설,연말연시에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책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다.

그 말이 나오니 또 다른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학습참고서나 만화나 잡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어떻게 감세 혜택을 주겠는가? 아니다,책은 다 같다. 그리고 어떤 책은 혜택을 주고 어떤 책은 혜택을 안 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모두 다 주기로 하자.술이 한두 잔씩 더 들어가니 모두들 문광부장관이 됐다가, 재경부장관이 됐다가, 나중에는 대통령까지 된다.

그래,좋다. 몽땅 감세 혜택을 주자.내가 준다.

책임진다….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되는 날,대낮부터 만취한 출판사 사장 서너 명은 효자동 재래시장을 비틀거리며 벗어나 미아리 눈물 고개를 외치며 쓸쓸히 제 갈 길을 갔다.

태양은 내일도 떠오른다고 중얼거리며.

도서출판 휴먼앤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