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정부의 요체는 단순히 낡은 정부 과정을 자동화하는 게 아니라 정보기술을 활용해 일하는 방식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정부를 재창조하는데 있다.

그러나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전자정부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종종 망각하는 이치기도 하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전자정부 사업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과도한 규제나 불필요한 문서작업들을 과감히 털어낸다든지,국민에게 더 간편하고 효과적인 서비스 제공을 가능케 할 참신한 대안을 만들어 낸다든지,정작 일하는 방식을 뜯어고치고 대민 서비스를 개선하는 정부혁신의 측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한 업무전산화 수준은 넘더라도 고작 잡화점식 웹기반포털을 구축해 민원행정서비스를 받게 하거나 그저 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식의 아이디어를 갖고 접근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BPR/ISP'로 약칭되는 업무프로세스재설계와 정보화전략계획 사업 가운데는 발주한 행정기관과 수주한 SI업체간의 '눈가리고 아웅'식의 나몰라라 게임으로 일관하다 끝나는 경우가 적지않다.

자원과 시간,권한 등의 제약 때문에 행정업무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SI업체로선 업무과정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업무의 정보화 방안을 모색하다 결국 효율성 극대화란 명목하에 정보를 있는 대로 최대한 집적해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그려내는데 힘을 쏟는다.

반면 정보화해 보았자 밑질 일밖에 없는 담당공무원들은 대부분 기술결정론이나 기계론적 정보화 마인드에서 벗어날 여력도 의지도 없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업무재설계의 성패를 좌우하는 정보기술채택(technology enactment)에서의 연계,즉 행정전문가와 IT전문가의 긴밀한 협력의 고리는 실종되고 만다.

전자정부 과제들의 대다수는 단일 부처가 수행하기에 부적합하거나 다수 부처와 관련된 과제들이다.

결국 부처간의 조정이 사업성패의 요체가 되는 과제들이다.

그런데 그 조정이 몹시 어렵다.

각 부처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다.

전자정부 사업의 혁신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권한과 조직 및 인력과 자원을 수반하는 사업을 차지하려고, 경쟁부처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래도 그 정도는 좀 나은 편이다.

정작 혁신이 요구되는 과제에서 자신의 권한을 내주거나 제한해야 하는 경우 기를 쓰고 저항한다.

실무조정의 최고위 수준에서 차관들은 상부의 명확한 지시가 떨어지기까지는 의리 있는 보스로서 조직의 요구를 비교적 충실히 답습하는데 역점을 둔다.

청와대는 부처가 미리 알아서 조정해 올릴 것을 주문하지만 장관들이 자발적으로 조정에 나서는 일은 좀처럼 없다.

결국 정부혁신으로서 전자정부의 참뜻은 정부부처의 영역 할거주의로 무참하게 퇴색되고 만다.

신뢰기반 없이는 전자정부의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NEIS 말고 다시 또 얼마나 고통스런 수업료를 치러야 할까.

아직도 관료들은 대다수가 신뢰 문제를 전자정부의 걸림돌이나 가급적 만나지 말아야 할 불운의 징후로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뢰 자체가 독자적인 전자정부 사업이다.

이 사업은 적어도 전자정부에서는, 그리고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춰볼 때 여느 사업처럼, 아니 정부혁신 과제가 그렇듯이, 상대적으로 높은 정책적 우선순위를 가진, 미리 미리 성실하고 용의주도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중점분야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혁신과제이기도 하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시민사회의 근원적 불안을 불식하지 못하고 원성을 샀던 관계부처들이 이제 와서 기존의 권한들을 고수하겠다며 핏대를 올리는 모습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연유에서 대통령 자신은 자다가도 보고를 받겠다며 열을 올리는 정부혁신이 오히려 혁신의 전도사가 돼야 할 부처들에 의해 이런저런 이유에서 사보타주 당하거나 지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회의가 엄습하는 것이다.

전자정부 성공의 열쇠는 결국 혁신이다.

혁신 없인 성공도 없다는 전자정부의 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다.

joon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