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워즈워스가 그의 시 '무지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뛰누나.

내 인생 시작할 때 마냥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노니'라고 노래하면서 문득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뒤이어 적었을 때,나는 이 시인이 망령된 줄로 알았었다.

어린이가 순정하고 착하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라니!

그런데 나는 지금 막 노벨상 수상작가이면서 명망 높은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두 권의 책을 읽은 후 이런 내 생각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린이는 결코 미완의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어른의 스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 좋겠다.

흔히 어린이는 성인이 되는 도정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결코 그저 '어리기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청소년기에는 인간의 모든 것,사고와 행동의 패턴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형성된다.

오에 겐자부로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청소년기의 한 해는 성년의 세 해에 버금간다.

아니,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하루는 성년의 일주일에 맞먹는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어린 시절의 시간은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간이 한량없이 길게 느껴지듯이 청소년기의 시간은 엄밀하게 집중된 시간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누구인가? 그는 '사육''인생의 친척''만연원년의 풋볼''개인적 체험'의 세계적 작가이면서 바로 히카리란 장애아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개인적 체험'은 장애아로 태어나 뇌수가 흘러내리는 아들을 부둥켜안고,자신의 운명을 수긍하게 되기까지 수시간을 막막한 기로에서 헤매던 바로 그 문제적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3부작 '타오르는 푸른 나무'를 끝으로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노라고 천명했을 때 나는 20세기 말 최고 작가의 조로한 소설쓰기에 대해 한탄을 멈추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바로 유년시절을 쓰면서 다시 돌아왔다.

미국의 9·11사태 이후 메시아 같은 새로운 사람을 바로 어린이들 속에서 발견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두 권의 에세이 '나의 나무 아래서''새로운 사람에게'를 읽은 날은 굵은 비가 많이도 내렸다.

'나의 나무 아래서'는 오에 겐자부로가 어린시절의 추억,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워온 과정을 돌아보며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체험과 독서경험이 한 인간의 '성장'에 얼마만큼 중요한 지에 대해 들려주는 교육 에세이다.

후속편에 해당하는 '새로운 사람에게'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독자는 물론 자신의 삶도 읽게 된다.

나는 왜 작가들이 자신의 유년시절로 자꾸만 회귀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만년의 괴테와 카프카를 떠올려 보면 그들의 작품은 유년의 아름답고도 고통스런 기억들로 버무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년시절은 작가의 원천이라는 교과서적인 말은 그만두기로 하자.우리는 여전히 어린 시절로부터 그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리라.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작가인 남아공 출신의 J M 쿳시의 '소년시절'을 보면 우리는 왜 유년이 중요한지 다시한번 절감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의 말을 빌리면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나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하는 바로 그 점이다.어린이는 생의 득실을 따지지 않는다.

왜 저 아이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없는가를 말할 때 계산적 사고는 틈입하지 않는다.

그저 직관이 가리키는 대로,몸이 가는 대로,마음이 가는 대로 따를 뿐.

그런 점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이 점을 '옛사람들'이 살던 세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새로운 사람'의 시대는 평화와 인간의 자존이 지켜지는 시대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과연 새로운 사람은 올 것인가? 평화를 들고,사랑을 품고 올 것인가? 우리를 구원할 그런 사람은 아마도 어린이의 모습을 하고 올 것이다.

적어도 작가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마음산책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