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김선일, 이름 석자 .. 천양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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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며,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풍경은 엄마가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을 때이다."
김선일씨의 무참한 죽음을 보고 눈물밖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던 며칠 동안 이 말은 생명의 소중함을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얘야 뜨거운 물을 함부로 수챗구멍에 버리지 마라.그 밑에 살고 있는 벌레들이 죽는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게 하신 그 말씀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은 온 우주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단장(斷腸)의 슬픔'이 바로 부모의 슬픔일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란 말이 절로 나왔다.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나는 죽고싶지 않다"던 김씨의 피맺힌 절규를 왜 듣지 못했단 말인가.
잠시 하늘을 원망도 해 보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잊고 산 탓으로 몹쓸 짓을 한 것이다.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을 짐승 같은 사람이라 하거나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라 한다.
테러범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내가 사람인 것이 짐승들에게 몹시 부끄러웠다.
짐승은 제 종족을 잡아먹지 않는다.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가릴 줄 알고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이를 탐내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동물 연구가는 "동물은 영혼을 치유하는 인간의 친구"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맹수가 아무리 약한 짐승을 죽인다 해도 테러범들처럼 죄악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들 하지만 생명존중의 이슬람 교리를 믿는 자들이 죄 없는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의 포악한 행동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는 말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멈추지 않는다. 오직 참는 것으로 원망을 멈추라"는 말을 그들은 알고나 있을까. "가위 바위 보에서 보자기는 주먹을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긴다. 그러나 가위는 주먹을 이긴 보자기를 이긴다.
여기에선 관계만이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정상에선 절대적인 승자가 될수 없다. 두 눈으로 봐도 보이는 사물은 하나"라는 말을 알기나 할까.
김씨의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골로 가는 것은/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라/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김씨의 하느님도 그래서 데려간 것이라고 위로해 본다.
이런 저런 가슴아픈 일들을 보고 느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는 것은 내가 경험했던 괴로움과 내가 타인에게 주었던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이 즈음에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어떤 고통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고통과 맞닥뜨려 보자는 것이다.
생의 고뇌를 겪은 사람일 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이다.김씨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두려움은 항상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은 자의 고통은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신문이나 TV 보기가 두렵다. 지옥이 따로 없고 희망이 따로 없는 세상이 보기 싫어서다. 아수라장같은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꿔놓을 큰 바위 같은 이가 그립다. 초록이 무성한 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무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그늘을 주듯이 지혜에서 나오는 경륜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넓은 바다처럼 바닥을 치치 않고 파도 같은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용맹스런 이를 만나고 싶다.
우주를 두루 읽고 작은 미물까지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귀하게 알았던 선인들의 인문적 소양이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요즈음이다.
밥을 먹어도 쓴 약을 먹는 것 같고 김선일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메던 며칠 동안,김씨 어머니의 눈물이 내 어머니의 눈물인 것만 같아 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오래 생각했다. 어머니만큼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것이리라.
김선일씨의 무참한 죽음을 보고 눈물밖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나지 않던 며칠 동안 이 말은 생명의 소중함을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얘야 뜨거운 물을 함부로 수챗구멍에 버리지 마라.그 밑에 살고 있는 벌레들이 죽는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내게 하신 그 말씀도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말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것은 온 우주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다.
'단장(斷腸)의 슬픔'이 바로 부모의 슬픔일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란 말이 절로 나왔다.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나는 죽고싶지 않다"던 김씨의 피맺힌 절규를 왜 듣지 못했단 말인가.
잠시 하늘을 원망도 해 보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사람이 하늘을 잊고 산 탓으로 몹쓸 짓을 한 것이다.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을 짐승 같은 사람이라 하거나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라 한다.
테러범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내가 사람인 것이 짐승들에게 몹시 부끄러웠다.
짐승은 제 종족을 잡아먹지 않는다.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가릴 줄 알고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이를 탐내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동물 연구가는 "동물은 영혼을 치유하는 인간의 친구"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맹수가 아무리 약한 짐승을 죽인다 해도 테러범들처럼 죄악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들 하지만 생명존중의 이슬람 교리를 믿는 자들이 죄 없는 생명을 빼앗았다는 사실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의 포악한 행동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는 말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멈추지 않는다. 오직 참는 것으로 원망을 멈추라"는 말을 그들은 알고나 있을까. "가위 바위 보에서 보자기는 주먹을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긴다. 그러나 가위는 주먹을 이긴 보자기를 이긴다.
여기에선 관계만이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정상에선 절대적인 승자가 될수 없다. 두 눈으로 봐도 보이는 사물은 하나"라는 말을 알기나 할까.
김씨의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골로 가는 것은/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라/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김씨의 하느님도 그래서 데려간 것이라고 위로해 본다.
이런 저런 가슴아픈 일들을 보고 느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는 것은 내가 경험했던 괴로움과 내가 타인에게 주었던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이 즈음에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어떤 고통이 있다면 피하지 말고 고통과 맞닥뜨려 보자는 것이다.
생의 고뇌를 겪은 사람일 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이다.김씨의 생명을 빼앗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두려움은 항상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남은 자의 고통은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신문이나 TV 보기가 두렵다. 지옥이 따로 없고 희망이 따로 없는 세상이 보기 싫어서다. 아수라장같은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꿔놓을 큰 바위 같은 이가 그립다. 초록이 무성한 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무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그늘을 주듯이 지혜에서 나오는 경륜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넓은 바다처럼 바닥을 치치 않고 파도 같은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용맹스런 이를 만나고 싶다.
우주를 두루 읽고 작은 미물까지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귀하게 알았던 선인들의 인문적 소양이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요즈음이다.
밥을 먹어도 쓴 약을 먹는 것 같고 김선일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메던 며칠 동안,김씨 어머니의 눈물이 내 어머니의 눈물인 것만 같아 나는 돌아가신 내 어머니를 오래 생각했다. 어머니만큼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