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는 어디서 오는가. 안 들리는 것도 들을 수 있는 귀,안 보이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순간에 온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악! 소리가 터져 나올 것처럼 낮게,넓게 가라앉아야 시의 이슬이 보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숨어 있어서 눈부신 연못이 있다. 죄없는 순간,아픔없는 순간엔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참선중인 영혼,계곡 물소리,새소리는 아마 수십 섬은 마셨을 것이다. 물론 숨어 있는 내 연못에 핀 꽃들이 이처럼 눈부신 것은 측량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한숨을 먹고 자라서이다. 수련 가시연 개구리밥 그들은 왜 둥근가. 물에 사는 것들이어서 그렇다. 출신이 더이상 세상의 경계가 될 수 없도록 물 위에 꽃 피우고 또 꽃 피우는,자라면서 제 몸에 가시를 키우는 가시연은 숨어 있는 연못에서 내 이름으로 사는 꽃이다. 나의 내면은 물론 온갖 세태 또한 이 연못에서 연씨로 바뀔 수 있도록 내 품에 심는다. 그러나 근간에 거론되고 있는 거의 천도 수준의 수도 이전 문제,서울대 폐지론,이라크 파병문제,미군 축소 문제,만두파동으로 인한 자살,성폭행당한 딸을 둔 어머니의 참혹한 선택 등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아득할 때가 많았다. 개개의 철학에 따라 쉽게 혹은 열렬히 환영하기도 하고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 같다. 심지어 오랜 세월 다양한 견해를 격없이 나누며 지내던 사람과도 근간의 긴박한 상황과 정책들의 타당성 유무를 논하는 일 자체가 어색해졌다. 김선일씨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우리를 비껴갔다. 우리 국민 모두를 가시연으로 만들었다. 채 자라지 못한 가시연의 향을 마신다. 비로소 내 몸에 이슬이 내린다. 몸속 이슬 저울에 근간의 시간들,시간 속에 새겨진 목소리,몸짓을 달아본다. 용케도 이슬 몇 잔 살았다. 강의중에 가끔 내 숨어있는 연못의 한 변형인 깊게,넓게 가라앉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이는 곳에서의 제모습 말고 혼자 숨어서 만나보는 자신,즉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진짜 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비슷한 이미지로 수도 이전 문제를 재임기간의 한 업적으로 분투 노력하겠다는 대통령에게,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국회의원과 시민들에게,또 이런 사항의 귀결에 따라 웃고 우는 우리 국민 개개인에게도 감히 묻고 싶다. 목청 높여 외치는,몸짓 크게 내젓는 모든 행위가 과연 혼자 숨어서 들여다보는 내면의 소리와 일치하느냐고.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한 결정을 애국심까지 동원해 굽힐 수 없는 신념인양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아니냐고. 부디 거시적 측면을 먼저 생각하는 신념을 지닌 지도자를 만나볼 수 있기를,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 또한 제 귀한 영혼의 분비물인 한 편의 감동적인 시의 탄생과정과 많이 닮았기를,판단하는 쪽은 상대방인데 그 귀중한 자격까지 외치는 자의 몫인 양 억지쓰는 모습 보여주지 않기를 바라면서 섬진강 모래밭을 모래바람을 맞으며 걸어본다. 강변에 오래 살아서인지 온갖 나무들은 풋풋한 처녀들의 그것을 맘껏 품어내고 서 있다. 해가 저물자 나무들은 강의 무릎을 신의 무릎인양 베고 누워서 흰 물의 고뇌,바람의 자유로운 방황을 마신다. 굳은살처럼 박혀있는 잘못된 인연들을 씻고 또 씻겨서 수의(壽衣)를 입혀 모래 무덤 속에 묻어준다. 백사장에는 촛불을 켜놓고 물새들에 쌀을 바치는 이들의 마음이 새하얗다. 물새가 흘린 답례의 눈물이 물웅덩이를 이루는데 함께 살면서 각자 살아온 발자국들이 덩달아 운다. 문득 쉽게 안 잊힐 것 같은 그,고(故) 김선일씨의 마지막 숨소리와 그를 위해 촛불 집회를 여는 이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몸을 떤다. 안 받아들여진다는 일,그 일을 함께 아파해 본 적 많을 것 같은 갈매기,저 울음소리에 섞여 보아야 할 것 같아 오랫동안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21세기 울타리에서도 세계 유일의 남북대치국가인 우리 민족의 비극,그 업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아 빚어진 참극의 현장이 아프고 아파서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