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진보와 보수의 '자기채찍질'..朴孝鍾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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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보·혁 갈등은 정치·사회적 갈등의 핵심 축이 됐다.
정치·사회적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여론이 이념에 따라 극명하게 대립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단 하나의 이념이 지배하기보다 두 개의 이념이 경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다원주의를 위해 좋은 일이다.
자연의 들판이 아름다운 것은 올망졸망한 꽃들이 서로 다르게 피어나기 때문이고 오케스트라 소리가 웅장한 것도 서로 다른 악기가 한데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한데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왜 조화보다 갈등의 대명사가 됐는가.
지금 진보세력은 사회의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함으로써 희희낙락하고 있는가 하면,보수는 대선에 이어 총선에서 패함으로써 열패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양자는 '조화로움'을 모색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진보와 보수 모두 인간본성의 일단이다.
사람들은 새로움을 원한다.
또 같은 것이라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휴대폰도 자주 바꾸고 컴퓨터도 자주 바꾸나 보다.
자연의 매력과 아름다움도 따지고 보면 그 새로움에 있다.
정동진의 아침해도 매일 같지만 뜰 때마다 새롭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동진의 일출을 보기 위해 밤열차를 타는 것이 아닌가.
보수주의자들은 불평한다. '개혁'이나 '변화' '진보'와 같은 좋은 개념들을 모두 진보주의자들에 빼앗겨 보수에는 '수구'와 '꼴통'만 남았다고…. 과연 그런가. 보수에서 낭만과 아름다움을 찾을 수는 없는가."지킬 것은 지킨다"는 보수도 인간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추억이나 향수없이 살 수 없다. 졸업앨범 없이 졸업하는 학생이 있는가. 왜 칠순 노인들이 여고시절의 교복을 입고 소풍가는 이벤트에서 어린애처럼 마냥 기뻐하는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애틋한 사랑을 체험해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는 새것에만 끌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옛것에도 끌린다.'옛것 지키기'는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래된 것,옛것에 끌리는 우리의 성향은 향수와 낭만 때문이다.
최근 '뉴보이'가 아닌 '올드보이'가 제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타지 않았던가. 고향이야말로 몇번이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닐까. 왜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도 "내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이 눈에 보이기 때문일 터이다.
'옛것 지키기'와 '새것 만들기'가 인지상정이라면 진보와 보수는 넉넉한 마음으로 비판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에 대해 "힘센 사람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라며 자본가와 사회적 강자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보수는 이 말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왜 하루아침에 메인스트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지 반성해야 한다.
과거의 실적과 명예에 취한 나머지 '자기계발'과 '자기혁신' 노력을 등한시했던 것이 화근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지킬 것'은 지키지 못하고 '바꿀 것'은 바꾸지 못한 구태 보수가 됐다.
한편 최근 영국의 포스터카터는 한국의 진보에 대해 '늦깎이 좌파'라며 "진보적 이념만 내세울뿐 실제 행동은 너무 복고적이고 국수적"이라고 비판했다. 승리감에 젖어있는 진보에게 이 말은 뼈아픈 일격이 아닐수 없다.
진보도 이 비판에 대해 기득권자의 수구적 논리라고 격분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행태가 구태의연한 '촌스런 진보'가 아니었는지 반추해봐야 한다.
21세기의 진보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지 고민과 성찰이 요청되는 대목이다.
진보와 보수는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 저급한 경쟁보다 외부로부터의 비판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품격과 품위를 높이기 위한 질적 경쟁에 돌입해야 한다.
보·혁 모두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현 상황에 도취되기보다 가시나무새처럼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백조처럼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며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는 비판과 쓴말을 가슴깊이 아로새기며 뼈를 깎는 성찰과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는 진보와 보수를 보기를 원한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