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自燈明 法燈明 .. 현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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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처님이 우리 인류 앞에 출현하신 지 이천오백마흔여덟 해가 되는 날이다.
이 날이 가까워 오면 만화방창한 오월 정취속에 오색 연꽃등이 도량을 수놓고, 불단은 정성스럽게 올린 다섯가지 공양물로 뒤덮인다.
또 다섯살배기 고사리 손에서 여든살 노보살의 주름진 손까지 연등을 만드느라 손끝에는 연잎 물감이 깊숙이 배어 든다.
음식을 장만하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중년 신도들과 초파일 제등행렬에 뽐낼 장엄물 제작에 날밤을 새는 청년들도 저마다 분주하다.
룸비니동산,마야부인,고타마싯타르타,사문유관(四門遊觀) 등 불교용어들도 등줄에 매달려 부처님 오심을 찬탄한다.
이런 수많은 불교 용어 중에서 불자들의 생각이 멈추는 곳은 아무래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탄생게일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이땅에 와서 행한 최초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말이 갖는 '혁명성'과 '교의적 함축성' 때문이다.
이 최초의 말씀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말씀인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자기와 법을 등불로 삼으라)'과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는 화엄경 구절을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자신이다.자신 안에 부처가 될 성품과 부처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지녔으므로,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여 자신과 세상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로 삼으라"는 뜻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오래도록 행복을 밖에서 찾으려 했다.
그래서 환경에 집착하고 소유욕을 증폭시켰다.
급기야는 명리에 집착하여 동전 한 닢과 한 치 명예에 목숨을 걸고,체면 하나에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황당한' 용기를 최근 우리는 목격했다.
이 일이 어디 그 사람들만의 일인가.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 일어나는 우리 모두의 자해적(自害的) 심정이다.
이는 결국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피조적 습관이 보편화된 슬픈 모습인 것이다.
삶은 경쟁이다.
이 가운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천군 만마를 통솔하는 이보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이기는 이를 우리는 승리자라 부른다"라는 말씀에서 보듯 외부의 경쟁 상대와 적은 쉬 알 수 있어서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지만 자기안의 적,즉 '자신마(自身魔)'는 쉽사리 자각되지 않고,조복(調伏)시키기도 어렵다.
최후의 적이자 경쟁 상대인 '자신마'를 조복받기 위해서는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 "나는 누구인가.어떤 것이 나인가"라는 '근본 마음'을 찾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얼마전 꼬마 여당이 집권하여 힘든 국정운영을 경험하고,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결과 역으로 거대여당을 탄생시킨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선거과정에서 승자의 패자스런 모습도 보았다.
자해(自害)적 언어로 노인과 장애인,동료들에게 어려움을 초래한 한 지도자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어디서 이런 결과가 왔을까?
밖으로는 거대 야당을 이겼지만 진실로 자기자신을 이기지 못한 때문이다.
한마음을 보는 이는 모든 것이 일심(一心)속에 동체(同體)인 줄 알고,자타(自他)가 불이(不二)함속에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나온다.
이런 사람만이 술(術)이 아닌 덕(德)의 정치를 할 수 있고 그래야 국민은 희망을 지닌다.
종교는 입으로 사랑과 평화를 말한다.
그리고 관용의 미덕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타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배타적이고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주의를 버리지 못한다.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거대한 성전을 세우는 일이 성스러움으로 포장된 배타성과 우월주의의 결과물이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자.
또한 먼저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세상의 고통은 뒤로 한 채 관념의 유희 속에 일신의 영달과 편안함에 안주하고,이웃의 고통을 덜기 위해 땀 한방울 흘리지 못한 무자비(無慈悲)한 불자는 아니었는지 점검해보자.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부처님 제자 되기를 오색의 연등불속에 타는 촛불처럼 빛나게 염원해 본다.
/前 송광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