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첫 학기가 되면 대학가에서 한자(漢字)를 둘러싼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한자가 많은 법 관련 교양과목 수강생은 항상 미달이고,한자로 표기된 서적을 찾지 못해 제 손으로 그리다시피한 책 제목을 책방 주인에게 내미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수가 획수 많은 한자를 섞어 가며 문장을 쓰기라도 하면 학생들은 이를 받아 적느라 그야말로 고개들이 바쁘다. 컴퓨터도사 소리를 듣는 우리 대학생들의 현주소다. 엊그제 서울대에서 발표한 한자시험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대학의 대학국어 수강생 1천2백64명 중 절반이 넘는 7백75명이 50점 미만을 받았으며,80점 이상을 받은 학생은 15%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일상적인 기본단어를 한자로 옮기지 못했으며,심지어는 '漢字로 옮기시오'라는 문제를 읽지 못해 우리 말로 답을 적어냈다고 한다. 국내 최고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 같은 한맹(漢盲) 사례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뿐이다. 한맹의 심각성은 비단 강의실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더욱 한심하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부모 이름을 한자로 써보라고 하면 대부분이 쩔쩔맨다고 한다. 이 정도 실력으로는 날로 증대되는 중국 등 인구 20억명 한자권 국가들과의 교역에 활용할 수 없어 별도로 한자공부를 시켜야 할 형편이라고 말한다. 급기야 경제 5단체에서는 한자를 모르면 아예 응시자격조차 주지 말자는 의견까지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실이 오직 학생 탓만은 아닌 듯하다. 70년대 한글 전용 교육의 여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어서다. 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중·고교에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는 교과서를 채택하고,1천8백자의 교육용 한자를 정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는 것 같지는 않다. '한글 전용'이냐 '국·한문 혼용'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러하다. 한자는 우리말 어휘의 70%를 차지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글과 한자는 새의 양 날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실력을 키우는 공교육이 시급한 실정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