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나키스트의 후예들 .. 朴星來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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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만의 대통령(총통)이 총격을 받고 부상했다.
선거를 하루 앞둔 19일 일어난 테러사건이다.
우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하지만 뭔가 불길한 기미가 한국의 하늘에도 떠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떠들썩하지만 평화로운 거리의 촛불시위, 아니면 TV를 불태우는 데모가 벌어진 정도지만.
비교적 평화로운 갈등의 공존이 내게는 아주 불길한 조짐으로 보이는 것은 탄핵사태의 종결이 어느 한 쪽에 대단한 실망을 줄 것이 뻔하고, 그것은 좌절과 분노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분노의 표현이 바로 테러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은 온갖 테러로 멍들어가고 있다.
개인과 개인, 종족과 종족,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종교와 종교….온갖 사람 사이의 갈등이 테러와 암살로 나타나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리고 대개의 테러는 '불의에 대한 응징'으로 나타난다.
실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가 어떻게 한 지식인의 사고에 변화를 주는지는 80년 전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경우에서도 드러나 보인다.
가난한 선비 출신인 그는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어, 황성신문 대한매일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했지만, 나라가 망하자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며 구국 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이 과정 속에 그는 새 사상에 물들면서 처음에는 민족주의자가 됐다.
"역사란 나(我)와 나 아닌 것(非我)의 투쟁"이라 선언한 그의 역사관은 민족이 그 투쟁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파악했다.
민족의식이 세상을 덮고 있을 그 시절 신채호로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지배하의 조국에서 쫓겨나 이역을 떠돌며 가슴 깊게 쌓인 좌절과 분노는 결국 그를 극렬한 아나키스트로 몰아갔다.
민족은 구제불능처럼 보였고, 그런 좌절에 빠진 신채호에게 때마침 전해진 서양의 아나키즘(anarchism: 흔히 '무정부주의'라고 약간 오해하기 쉬운 말로 번역된다)은 세상을 구하는 복음이었을 게다.
어디 세상에 핍박받고 서러운 사람들이 조선인 뿐일까? 조선 민족을 구하는 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세계의 권력 및 경제적 구조 그 자체를 때려 부수지 않고서는 민족의 구원이란 불가능해 보였다.
조선의 해방은 곧 세계의 해방이어야 한다.
상해에서 조선인 최초의 아나키스트 단체로 의열단(義烈團)이 창립되자 그는 1923년 그 선언문('조선혁명선언')에서 암살 파괴 폭동을 선동하고, 그 목표물로 (1)조선총독 및 각 관(官)의 관리 (2)일본 천황 (3)정탐노(偵探奴)와 매국적(賣國賊) (4)적의 일체 시설물 등을 들었다.
대단히 극렬한 표현의 이 선언문에는 이런 표현도 있다.
"우리의 세계 무산대중, 더욱이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민중의 피와 가죽과 살과 뼈를 빨고, 짜고, 씹고, 물고, 깨물어 먹어 온 자본주의 강도제국 야수 군들은 지금 그 창자가 꿰어지려 한다.
배가 터지려 한다!" 그 후 중국에서 주로 한국 역사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1928년 아나키스트 활동 관련으로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1936년 만주 여순(旅順)의 차가운 감방에서 병들어 죽었다.
"파괴는 새로운 창조"라고 외친 미하일 바쿠닌도, 일본 것이라면 모두 폭파해 버리자는 신채호도, 사실은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던 것 같다.
또 아나키즘이라지만, 그 전통 가운데에는 "물처럼 아래로 흘러라!"(上善若水)를 말한 노자(老子)에서부터 테러를 예찬한 서양 사상가들까지 여러 모습이 있다.
아나키즘의 궁극적 이상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의 구현이다.
하지만 특히 그 이상이 좌절과 분노로 점철될 때 아나키스트는 폭력을 예찬하고 동원하게 된다.
엄청 많은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21세기의 아나키스트를 연상시켜 준다.
이들 사이의 갈등을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가들의 몫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정치가들은 갈등을 극대화해 자기편의 이익을 취하려 골몰할 뿐이니, 그 것이 걱정이다.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