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0년대 초반 일군의 젊은 경제학자들이 동남아를 다녀와서 썼던 기행문들을 생각한다. 조국의 가난을 안타까워했던 그 떨리는 문장들…. "우리는 왜 인도네시아나 태국처럼 잘 살지 못하며,우리는 왜 필리핀처럼 민주주의를 하지 못하나" "왜 우리 농촌은 이다지도 가난하며 산업은 또한 이렇게 싹수조차 없단 말인가"라고 그때 이후 지금껏 진보파 경제학자 그룹을 이끌어왔던 박현채 교수나 변형윤 교수같은 분들도 한탄했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행문을 남겼던 때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러 지금 태국과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근로자들은 한국에서 가난한 일자리를 찾고 있고,객지의 일터에서나마 밀려나지 않으려고 오늘도 불법체류 단속반원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앞선 자가 뒤처지고 뒤진 자가 앞서기에는 30년,한 세대면 충분했다. 물론 박현채나 변형윤 교수같은 분들의 논리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던 덕분으로. 한국의 크고 작은 호텔을 드나들고 있는 중국의 지방정부 관리들과 비즈니스맨들이 지금 다시 우리의 시선을 채우고 있다. 그들은 "낡은 기계를 뜯어 칭다오로,다롄으로 옮겨오시라"며 고통받는 한국의 중소 기업가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장부 가격이 이미 제로로 떨어진 낡은 기계를 "그러나 시장가격으로 쳐드릴 테니…" 중국으로 오시라고 전국의 공단과 기업들을 종횡으로 훑고 있다. 1990년대 초 중국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우리의 60년대 풍경'이라던 허다한 자만의 기행문들이 쏟아져 나왔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하이닉스 자회사였던 하이디스와 쌍용자동차가 이미 중국에 팔려갔고 이제 미들테크를 넘어 노트북PC 반도체 등 하이테크까지 중국에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30년이 아니라 불과 10여년이면 국가 순위도 역전되는 '시간 단축'의 시대가 됐다. 노무현 정부 1년을 맞아 우리의 시간을 5년,10년 앞으로 다시 밀어본다. 그때의 풍경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래도 2000년까지는 잘 살았었는데…"라며 이미 한참 잘못 달려온 길을 돌아보게 되지나 않을지를 늦은 밤 홀로 거실을 서성이며 생각하게 된다. 돌아보면 그것은 1년이 아니라 '국민의 정부' 후반기,그러니까 김대중 정부가 생산적 복지의 깃발을 내걸면서 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설익은 분배론은 몇년 사이 오히려 주류로 옮겨 앉았고 분배론이 강해질수록 서민의 살림·국가의 경제력은 더욱 악화된다는,정말이지 잔인한 경제법칙은 애써 무시되고 있다. 이 1년 동안 인도가 뛰고,브라질이 내달리고,러시아가 도약하며,일본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일대 혼전이 진행되어왔다. 냉전 붕괴 이후 10년의 국세(國勢) 지도가 이제 새로 그려질 것인지,그리고 새지도에서 한국의 좌표는 어디쯤일지 생각하게 된다. 국가를 기업에 비겨 경쟁을 거론하는 것은 매우 낡은 수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할 수만도 없다. 자유주의의 냉정성이 싫다며 정체도 불명인 제3,제4의 길을 더듬고 다닌다면,그리고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 만으로 국정을 설계하기로 든다면 한 국가를 낙오의 대열로 밀어넣는데 10년도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제 취임 1주년 기념 회견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밀어달라고 말했지만 죽끓듯하는 싸움판의 한켠에서 성장의 엔진이 조용히 꺼져가고 있다는 생각만이 가슴을 압도할 뿐인데….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