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후 금융감독위원장 시절 '구조조정의 전도사'로 불리며 한국 기업들을 위기관리형으로 확 바꿔 놓았던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그가 지난 22일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장과의 조찬 회동을 통해 '창업형 기업가 육성'을 새로운 화두로 던진 데 대해 기업인들은 적극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떠름한 반응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과감한 외부자금 차입을 통해 신규사업에 나섰던 기업인들을 6년 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단죄하고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으로 내몰았던 주역이 다름아닌 이 부총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앞장섰던 '월가식 구조조정론'은 외국자본의 대거 유입과 오너 기업인의 위축 속에서 관리형 전문경영인들을 전면에 나서게 하는 요즘의 기업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부총리가 지적한 '관리형 기업가의 득세로 인한 투자 부진과 경기침체 가속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그 자신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 '결자해지'를 할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 위축돼온 기업가 정신 정부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선단식 그룹경영'을 했던 기업주들을 지목했다. 은행차입과 외형 위주의 방만한 경영, 합리성을 결여한 오너들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무리한 중복투자, 기업부실에 책임을 지지 않는 오너들의 막후경영 등으로 인해 기업이 부실해졌다는 논리였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을 주축으로 한 정부당국은 대안으로 △부채비율 2백% 이하로 축소 △상호출자ㆍ지급보증 폐지 △출자총액 제한 △그룹비서실ㆍ기획조정실 해체 △중복투자기업의 빅딜 추진 △재무구조개선 약정 및 기업ㆍ자산매각 강제 △오너의 책임경영 등을 제시했다. 이같은 정책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불리며 경제 전반으로 파급됐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1등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 신규사업 급감 등 부작용 정부는 '창업가형'기업들을 '관리형'으로 바꾸는 대신 시장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주체로 벤처기업을 꼽았다. 한때 벤처기업은 전통 제조업체의 시가총액을 앞질렀고 2000년 신규 일자리가 86만개나 늘어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정보기술(IT)산업의 거품 붕괴로 벤처기업들이 무너졌고 전통 제조업체들은 벌어들인 돈을 쓰지 않았다. 설비투자가 급속히 위축돼 2002년 국내 제조업의 유형자산 총액은 1967년 통계를 작성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고용인원도 줄거나 정체돼 포스코의 경우 매출이 2002년 6% 늘었는데도 종업원수는 26명 감소했다. 지난해에는 전체 기업들의 설비투자뿐만 아니라 일자리까지 줄어드는 지경에 빠져들었다. ◆ 모험적 기업가정신 회복될까 재계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하늘과 우주사업 참여'를 꿈꾸며 삼성항공 현대우주항공과 같은 다소 무모해보이는 회사들까지 설립, 고용과 설비투자 확대를 주도했다. 이 부총리가 지난 22일 강신호 전경련 회장을 만나 "창업형 기업가를 우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같은 '모험적 기업가 정신'에서 돌파구를 찾겠다는 것으로 재계는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오너라는 이유로 무한 책임을 강요받고 SK㈜ 같은 대기업도 적대적 M&A에 대한 보호장치가 없어 경영권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외국자본이 국내 주식시장을 점령하고 사외이사 위주의 기업지배구조와 재무제표를 중시하는 금융관행을 그대로 둔 채 설비투자와 고용을 늘리라고 촉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게 재계 일부의 반응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창업형 기업가를 우대하겠다는 이 부총리가 어떤 정책을 주문할 것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세제지원뿐만 아니라 출자총액제한 등의 규제철폐,기업에 대한 사회인식 변화 등을 우선 고려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