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는 남의 이름을 도용하고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행사하는 것이 유행이다. 정치세계에서는 자기 이름을 도용당한 다수의 '국민'들이 이름 도둑들의 정치 행위 예술에 역겨워한다. 경제세계에서는 '신용'이란 이름이 도난 순위 1위에 오른다.근래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때 상호'신용'금고가 그리했고,'신용'조합도 그러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미국 경제 호황 덕분에 회복되던 국내 경기가 9·11 테러사태에 주춤하는 조짐을 보였다. 정부는 내수 진작 조치의 일환으로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 한도를 풀어주고,사용액에 대해 세액공제 혜택을 고안해냈다. 이같이 기발한 정부조치와 이웃나라 중국의 고성장 견인 덕분에 한국은 세계적 불황의 악천후 영향권에서 벗어나 온난한 기후를 누리는 듯했다. 그러나 카드회사와 사용자간에 누이 좋고 매부 좋아 보이는 상호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 그것은 카드회사들에는 시장점유율 경쟁과정에서 고객의 '신용'유무를 가리지 않고 카드를 남발하는 경향을 누르는 제동장치가 없었고, 사용자들에게는 자신의 채무변제 능력을 초월하는 현금서비스 사용을 삼가는 자제력이 없었고,정책당국은 건전성 규제와 관치금융을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드회사를 소유한 대주주들은 신나는 사세확장과 짭짤한 돈버는 재미에 내부통제가 느슨해졌다. 금번 LG카드 사태에 수년전 현대증권 사태와 유사한 대목이 많다. 이번의 이헌출 사장이나 지난번의 이익치 사장이나 비금융계 출신이다. 대체로 금융계 출신은 리스크 기피성향을 지니는 반면, 실업계 출신은 리스크 선호 경향을 보인다. 전자가 쫀쫀하다면 후자는 화끈하다. 전자가 소심한 운전사라면,후자는 과감한 불도저 맨인 셈이다. 불도저를 앞세우니 업계 수위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금융계는 불도저를 함몰시키는 늪지대다. 'BUY KOREA'바람에 대우그룹 부실의 풍선이 급속팽창을 가능케 했고,그룹 도산 이후 금융위기를 몰고 와 공적자금 투입부담을 증대시켰다. LG카드 역시 금융위기 가능성을 초읽기 국면으로 몰았다. 지난 주말 LG카드 유동성 위기가 파국 직전에 정부중재로 어렵사리 마무리됐다. 대주주(그룹총수)가 지분전액을 내놓고 은행이 여신을 연장해주기로 하고 추후 상황에 따라 출자전환한다는 등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정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하다. 이번 협상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이슈 가운데 부실책임 문제가 있다. 리스크관리에 철저해야 할 은행 등 채권단의 책임을 물어 당연하다. 그래서 협상결과처럼 채권단이 여신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LG카드사와 그룹에 있다.불도저를 금융기관 CEO로 시킨 것은 누구인가. 그룹총수일 것이다. 마땅히 책임져야 하고 그래서 자기지분을 내놓았을 것이다. 채권단에 그룹 총수의 개인 입보 요구를 부당하게 보는 견해가 있다. 지주회사 체제로 지배구조를 바꾼 이후라는 것이 이 견해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같은 체제 전환은 카드사 부실이 공지의 사실로 된 이후의 일이다. 카드사가 성업할 때는 이를 통해 계열 전반의 자금 조달에 도움을 받다가 카드사가 경영애로의 조짐을 보이자 연대책임 질 고리를 끊으려고 서둘러 지주회사 체제를 선택했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가? 유한책임이니까 지분만큼 책임지겠다면,은행도 역시 같은 입장이다.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를 말하려면 우선 신용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신용카드 발 금융위기는 카드의 신용을 회복하는데서 비롯돼야 한다. 경쟁사인 S사의 경우 지난 봄 이래 그룹차원에서 증자 등 자구책 마련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LG카드는 그간 무엇을 했는가? 일차적으로 그룹차원에서 카드사에 대한 일반 국민의 믿음을 높이는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 오랫동안 국민의 LG그룹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사랑해요, LG",그것은 믿음의 토양에서만 가능하다. LG가 국민의 사랑받는 그룹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그룹전체의 공멸을 각오한 신용회복 노력이 있어야 한다. 카드 따로,가전 따로,다른 계열사 각각 따로가 아니다. pjkim@ccs.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