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은 가끔 착각을 일으킨다. 어떤 상황을 접했을 때 이미 알던 일이란 느낌이 들기도 하고 거꾸로 평소 알고 있는 것과는 영 딴판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이를 불어로 '데자부(deja-vu)'와 '자메부(jamais-vu)'라고 한다. 데자부는 기시감(旣視感), 자메부는 미시감(未視感) 또는 착시감(錯視感)으로 옮길 수 있다. "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라면 데자부, "오늘 따라 출근길이 왜 이리 낯설지…" 하면 자메부인 셈이다. 최근의 금융시장은 일종의 데자부 현상처럼 느껴진다. 지난 3월 상황이 기억에 새롭다. 당시는 새 정부 출범 직후 북핵, 이라크전, SK글로벌 사태, 카드채 문제로 최악의 상태였다. 8개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 테러 확산, LG카드 사태 등 엇비슷한 악재들이 꼬리를 문다. '불안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는 미묘한 자메부 현상을 일으킨다. 분명 출발은 돈을 받은 정치권의 문제였다. 대통령은 측근 비리 탓에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야당 대표와 대선 후보가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수사가 진행될수록 정치권은 뒷전으로 빠져 나갔고 돈을 준 쪽(기업)에만 돌팔매질이 집중되는 모습이다. 11월을 마감하는 이번주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상황들이 단순한 착시인지 아니면 실제 상황인지를 가름할 한 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LG카드 유동성 문제가 고비를 넘길지, 검찰이 대기업 총수나 구조조정본부장을 몇 명이나 포토라인에 세울지가 최대 관심거리다. LG그룹이 두 사안에 모두 걸려 있다는 것도 묘한 일치다. 금융시장은 날계란과도 같은데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깨지는지 아닌지 이리저리 던져보는 식이라면 정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월말이라 주목해야 할 경제지표도 많다. 통계청의 '10월 산업활동동향'(28일)은 'U'자형 회복과 'L'자형 게걸음 사이에서 판단 근거를 제공할 전망이다. 한국은행의 '3분기 교역조건 동향'(26일)에서 수출 호조의 손익계산서를 만들어보고 '10월 여수신 금리동향'(27일)에선 대출금 이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를 따져봐야 할 것 같다. 국세청의 93만여가구 기준시가 인상과 현투증권 매각 본계약도 임박했다. 신문 정치면은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여부가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부안 방폐장, 이라크 추가 파병, 스크린쿼터 문제 등은 한 걸음도 내디디지 못한 채 또 시간만 죽일 것 같다. 23일은 소설(小雪)이었다. 얼룩지고 지저분한 세상을 하얗게 눈으로 덮기엔 아직 멀었나 보다. < 경제부 차장 oh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