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炳鎰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경제학 > 소탕작전에 나선 국군과 경찰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은 빨치산들이 밤이면 민가로 내려와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식량을 약탈해갔다. 날이 새면 경찰들이 그 민가에 들이닥쳐 왜 빨치산들을 돕는 이적행위를 했느냐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얼마 후 또 내려와 양민을 위협하고 식량을 빼앗아갔다. 다음날 경찰이 나타나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양민을 경찰서로 데리고 가 다그치기 시작했다. 양민을 아무리 몰아세워도 빨치산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경찰은 그 마을 주민 모두가 빨치산을 도와주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전 주민을 끌고가버린다. 모 재벌 회장의 "??당이 집권하면 표적 사정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만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또 재벌 총수들이 불법 대선자금 제공 혐의로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지고 줄줄이 소환되는 오늘의 개탄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왜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인 지리산 빨치산 소탕작전이 오버랩되는지 모를 일이다. 신임 전경련 회장이 취임 즉시 검찰총장에게 달려가 경제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조속한 시일 내에 수사를 매듭지을 것을 주문하지만,조속히 사건을 종결하기보다는 끝까지 철저히 수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국민의 여망인 듯하다. 철저히 수사해서 비리의 뿌리를 발본색원해야 마땅하다. 철저하게 법을 집행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번이야말로 한국에 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초점이 어긋나 있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과잉논란을 빚으면서까지 수십명의 거물급 기업인들을 출국금지시켜 기업의 정상적인 운영을 막아놓고는 정작 문제의 핵심이자 대선자금 수사의 시작과 끝이어야 할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서는 '쎄게' 나오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빨치산들을 소탕하지 않는 한 애꿎은 양민들 모두를 잡아가 문초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돈을 준 기업의 총수들이 연이어 소환되는 마당에 그 돈을 받은 정치권은 꿀먹은 벙어리 시늉을 하고 있다. 불법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 석고대죄 심정의 참회와 뼈를 깎는 쇄신을 결연하게 다짐했던 정치권은 어디에 있는가?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이 초대형 태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정치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은 대선자금 전모를 공개하겠다는 이야기만 녹음기처럼 되풀이할 뿐이고,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와 최병렬 대표가 "법에 따라 엄중히 심판받겠으며 검찰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던 다짐은 온데간데 없고 검찰의 소환 요구를 이런저런 핑계로 기피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수사가 끝난 후,정치권이 희망의 싹을 피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수사 후 정치인들이 기업에 불법 정치자금을 요구하지 않고,기업도 다시는 정치인들에게 검은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 밝은 세상이 올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누가 한국의 정치드라마는 재방송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매일 새로운 기업 이름이 언론을 장식하며 그 총수가 검찰청의 '포토라인'에 서는 장면을 보면서 몇 년 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할 때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청사로 소환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정치 불신이 극단을 치닫는 와중에 국회가 국회의원 숫자 늘리기엔 합의하면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 전혀 협조하지 않고 있음에 분노하기에 지쳐 이제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렇지.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게 낫지,니들이 무슨 정치개혁을. 작금의 불법 정치자금 문제를 사람의 문제로 보는 한,우리의 분노와 허탈은 주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기업의 생사를 여전히 좌지우지하고 막대한 이권을 나눠줄 수 있는 권한을 갖는 한 정경유착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자의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간섭의 여지를 줄이고 시장기능을 회복시켜야만 우울한 한국의 정치드라마는 재방송을 멈출 것이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사무총장 byc@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