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경수로 사업 '겉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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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만들어 놓고 봐야죠.멀쩡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지난 5일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의 경수로 사업중단 발표가 있은 다음날 D,H사 등 국내 중공업체들마다 비상이 걸렸다.
이들 업체는 경수로 공사를 총괄하는 한국전력과 원자력발전용 주기기 및 각종 기자재 공급계약을 맺은 상황.증기발생기 터빈 가압기 등 주기기는 물론 펌프와 모터 변압기 등 각종 보조기기까지 합쳐 조(兆)단위 금액이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다.
표면상 1년간 공사 잠정중단이었지만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사실상의 사업중단 상황에서 각 업체마다 이해득실을 따지며 비상회의를 열었다.
"당연히 생산일정을 늦추는 것으로 조절할 줄 알았죠.그런데 윗선의 지시는 제작기간을 무조건 앞당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상 제작한 만큼 공사대금을 받게 돼 있으니 무조건 만들어 놓고 보자는 게 회의 결과였다고 한 업체 관계자는 말했다.
최악의 경우 납품계약이 취소되더라도 이미 설계와 제작에 착수한 비용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것.
경수로 사업에 참여한 외국업체들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미국과 독일의 엔지니어링업체에서 하청을 받은 국내 기계업체들도 연일 무조건 빨리 납품하라는 독촉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지금 당장 제작에 착수하지 않을 경우 하청계약을 취소하겠다는 반 협박도 서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언제 쓰일지도 모르는,아니 가동 한 번 하지 못하고 폐기될지도 모르는 개당 수십억∼수백억원짜리 고가기기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하지만 이들 업체에 이러한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
어차피 제작비는 한국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나오는 '눈먼 돈'일 뿐이다.
"수주량 감소로 실적부진에 시달리는 업체들로서는 대금회수가 1백% 보장된 아까운 기회라는 판단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국제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좌초하고 있는 경수로 사업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프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경수로 사업에 투입된 우리 정부의 예산만 1조2천억원이 넘고 발전용 기기는 5년 뒤인 2008년에야 설치될 예정이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