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기이치 전 일본 총리(84).참의원 2회,중의원 12회 등 만 50년의 의원 경력이 보여 주듯 일본 전후 정치사의 산 증인이다. 외상,관방,재무 등 일본을 주무르는 핵심 요직도 빠짐없이 거쳤다. 이런 그가 지난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1월 중의원 선거를 앞둔 자민당의 세대교체 차원에서다. "(물러나는 것이)너무 늦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는 소회를 남겼지만 그가 '스스로' 마음을 비운 것은 아니었다. 73세 의원정년제 도입을 추진 중인 당 집행부의 젊은 피 수혈론이 거부할 수 없는 대세였다. 미야자와 전 총리만큼 언론으로부터 우호적 평가를 받은 일본 정치인들은 흔치 않다. 도쿄대 법학부 졸업 후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는 '엘리트'의 수식어가 줄곧 따라다녔다. '비둘기 파''호헌파의 대표 논객'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정치 노선이 합리와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외국에 무력행사를 않는다는 일본의 기본원칙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헌법 개정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오부치 내각에서 대장상으로 자리를 낮춰 입각한 후 과감한 부양책으로 경기를 살려낸 그의 솜씨는 '헤이세이의 다카하시 고레키요'라는 닉네임을 안겨 주었다. 1930년대의 일본 경제를 공황의 수렁에서 건져낸 다카하시 전 총리에 비유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도 시대의 변화를 막지는 못했다. 싱싱한 엘리트들을 간판으로 내건 야당의 도전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장로 정치의 청산이 불가피하다는 자민당의 자각 앞에서 그는 현역이 아닌 '국가 원로'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과 정계는 그의 결심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또 다른 거목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나더러 은퇴하라는 것은 정치적 테러 아니냐." 은퇴해 달라고 머리를 조아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무례하다며 화를 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85)도 28일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세대교체'라는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