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쑹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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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현대사를 얘기할 때는 으레 송가(宋家)의 쑹아이링(송애령) 쑹칭링(송경령) 쑹메이링(송미령) 3자매가 등장한다.
둘째인 쑹칭링은 '중국혁명의 아버지'로 통하는 쑨원(손문)의 아내로 나중에 중국의 부주석 자리까지 올랐고,첫째인 쑹아이링은 국민당 시절 돈줄을 거머쥔 재정부장 쿵샹시(공상희)와 결혼했다.
며칠 전 1백6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타계한 쑹메이링은 장제스(장개석)의 부인이다.
이들 3자매 중에서도 특히 쑹메이링은 격동의 20세기 중국현대사의 산 증인으로 꼽힌다.
1927년 장제스와 결혼한 쑹은 남편과 함께 전쟁터를 누볐고,미국의 명문 웨슬리대학 출신답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충실한 외교고문 역할을 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것은 순전히 그녀의 노력 덕택이었고,제2차 세계대전중 미 의회에서 행한 항일지원 연설은 국제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화려한 외모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켰다.
미국 언론들이 '강하고 아름다운 여인' '우아함으로 미국을 사로잡은 여인'이라고 평한 것만 봐도 쑹의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쑹의 고집과 대담성도 자주 회자된다.
장제스가 쑹에게 청혼했을 당시 형부인 쑨원은 물론이고 언니도 극구 반대했다.
인민혁명이라는 쑨원의 뜻을 거역할 뿐만 아니라 장제스는 아이가 셋이나 딸린 기혼남으로 나이가 너무 많은데다 출신 마저 비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의 예상을 뒤엎고 결혼을 감행했다.
쑹의 과단성은 시안(西安)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항일 국·공합작을 요구했던 장쉐량(장학량)이 중국공산당 토벌에 나선 장제스를 구금하자,쑹은 시안으로 달려가 저우언라이(주은래)와 배짱담판을 벌여 구출한 것이다.
남편이 서거한 75년 이후에도 쑹은 미국과 대만을 오가며 양국간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았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를 온 몸으로 지켜본 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3세기를 살아온 쑹메이링은 조카만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슴속에 아직 생생할 것 같은 중국현대사의 상흔도 함께 간직한 채.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