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에 기항하고 있는 국내외 선박회사들 중 절반 이상이 부산항을 떠날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해운수산개발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올들어 화물연대의 잇따른 파업에다 태풍피해까지 겹쳐 하역작업이 큰 지장을 받기는 했지만 고객들의 신뢰추락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국내 수출입화물의 80% 가량을 취급하고 있는 부산항의 경쟁력이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서둘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동북아 물류중심'은 고사하고 우리의 산업경쟁력 자체가 엄청난 타격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부산항의 위상은 최근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중국의 주요 항구들이 시설을 대폭 확충하면서 강력한 경쟁상대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후년에 개항할 예정인 상하이 양산 신항은 앞으로 20년간 52개 선석을 건설해 3천만 TEU를 처리할 수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컨테이너 항구로 성장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중이며,칭다오 톈진 다롄 등도 각각 컨테이너 처리능력을 크게 확장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행 환적화물이 크게 줄어들어 최악의 경우 부산항 물동량이 3분의 1 가까이 감소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동북아 허브항'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건 물론이고, 자칫 대만의 카오슝항처럼 경쟁대열에서 완전히 탈락할지 모르는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관계당국이 이같이 다급한 현실을 외면한 채 항만개발 투자나 물류서비스 개선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접안시설은 물론이고 보세창고 가공시설 등이 모두 크게 부족하며,하역·통관업무 자동화도 매우 낙후돼 있다. 게다가 항만 배후지 개발이 부진하고 물류 소프트웨어도 빈약해 단순한 화물반출입에 그칠 뿐 부가가치 창출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부산항의 경우 올해 1월에야 겨우 부산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신선대 부두에서 바로 경부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광안대로를 개통했을 정도니,다른 항만의 물류관련 인프라가 얼마나 빈약할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판국에 설상가상으로 화물연대 파업과 태풍으로 인한 피해까지 막심하니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정부와 해운업계는 국내 물류산업의 사활을 걸고 과감한 시설투자와 소프트웨어 개발을 추진하는 한편,외국 대형 운송업체 유치에도 발벗고 나서야 마땅하다. '동북아 물류중심'은 막연한 구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 돼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