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은행노련의 후안 호세 자놀라 위원장(62). 196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해온 그는 BNL 은행 소속이다. 1976년이후 은행 업무는 일절 하지않고 있지만 월급은 1천1백페소(3백50달러 상당)씩 꼬박꼬박 받고 있다. 여기에 은행노련에서 받는 위원장 월급 3천페소를 합치면 그의 "공식 월급"은 4천1백페소으로 늘어난다. 아르헨티나 생산직 근로자 평균임금(4백50페소)의 10배 가까운 수준이다. 기자의 통역을 맡았던 한 교포는 "'비아티코'라고 불리는 생활보조비를 합치면 실제 급여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자놀라 위원장 자신도 "노조 간부들 임금이 일반 근로자들보다 많은 것은 사실"이라며 "옛날부터 그랬다"고 말했다. 70세의 오스카 레즈카노 전력노조위원장.그 역시 '에데수르'라는 전력회사와 전력노조로부터 각각 2천페소씩 4천페소의 월급를 받고 있다. 2년전 회사가 민영화될 때는 특별 위로금조로 3만5천달러를 일시불로 받기도 했다. 레즈카노 위원장은 "우리 같은 노조간부들이 '노동귀족'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은행권에 힘을 써준 덕분에 6명의 자녀중 5명이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는 위원장이라는 직분이 여러모로 힘들고 어려운 자리인데다 조합원들에게 폭넓은 복지혜택을 제공하고 있는 만큼 '특별대우'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한때 조합원이 9만명에 달했던 전력노조는 그동안 1만4천명의 근로자들에게 조합주택을 지어줬다. 조합원들의 갑작스런 사망에 대비해 부인 명의로 3천페소짜리 생명보험도 들어준다. 또 전국에 9개의 호텔과 숙박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3∼4개의 리조트 시설도 갖고 있다. 어디에서 그많은 돈이 생겼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레즈카노 위원장은 "1964년 조합원 총회에서 임금 인상시 첫 달의 인상분을 전액 노조에 기부하기로 결의해 기금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조의 수입이 조합원들의 기부금만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산별 노조들은 근로자들의 건강·의료보험을 직접 거두고 관리·집행한다. 월 급여의 6%를 기업이,3%를 근로자가 내는 이 돈은 연간 1백억달러에 달한다. 산별 노조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전체 징수금액의 일부를 노조가 갖는다. 은행노련의 경우 1년에 1억6천만페소(5천5백만달러 상당)를 거둬 그 중에 10%를 노조 수입으로 가져간다. 자놀라 위원장은 "이 돈으로 근로자들이 휴가를 즐길 수있는 호텔을 짓거나 근로자들의 재교육 등에 투자한다"며 "정부가 3개월 간격으로 자금사용 현황을 점검하고 있어 자금집행은 아주 투명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현지교포들의 얘기를 빌리면 돈의 일부는 페론당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정노(政勞)유착'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아르헨티나 노조와 간부들이 이처럼 많은 권한과 재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자들은 외환위기에 대해 한결같이 "우리는 책임이 없다"고 강변한다. 모든 것은 정부의 무능에서 비롯됐을 뿐 자신들처럼 힘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책임이 있느냐는 주장이다. 묘하게도 일부 경제계 인사들도 노조의 이같은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과거 페론정권 때야 노조가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 하지만 지난 수십년동안 아르헨티나 경제를 이끌었던 공기업 문제로 들어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현재 대부분의 공기업은 민영화됐지만 아직 과거의 부실을 털어내지 못했다. 투자여력도 별로 없는 상태다. 또 적자투성이의 공기업을 정상화(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부재원이 투입됐다. 1989년에는 전체 공기업의 적자규모가 당시 GDP의 7% 수준인 1백억달러에 달하기도 했다. 공기업의 이같은 부실은 높은 임금과 과다한 인력 고용,낮은 생산성에서 비롯됐으며 여기에는 노조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아르헨티나 최대 공기업이었던 YPF의 경우 거센 노조에 밀려 인력 및 사업구조조정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90년 이 회사의 원유생산량이 하루 41만배럴에 머문데 비해 종업원은 무려 5만2천명에 달했다. 당시 종업원 채용에는 노조 간부들의 연고가 작용했다. 생산성이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그런데도 노조의 요구로 병원 학교 주택관리 등의 후생사업에 많은 재원을 쏟아부어 연간 6억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YPF가 얼마나 기형적인 경영구조를 갖고 있었는지는 민영화 직후에 드러났다. 민영기업으로 변한 YPF는 무려 5만명의 종업원을 해고했다. 그런데도 생산량은 줄어들지 않았다. 불과 2천명이 과거 5만2천명이 하던 일을 감당해낸 것.물론 YPF는 근로자들을 대량 해고하면서 10억달러의 퇴직 위로금을 별도로 지급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노조의 파워가 얼마가 강력한지,아르헨티나 기업들의 경쟁력이 왜 떨어지는지,더 나아가 아르헨티나 경제가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YPF의 사례를 보면 금방 알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