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씩 공직에서 일하고도 갈 자리가 없으니 전관예우가 예전 같지 않네요." 법조계 못지 않은 전관예우 전통을 가진 관가에서 터져나오는 푸념들이다. 일부 퇴직 고위 관료들은 명퇴금으로 골프장 평일회원권을 사 '주4파'(일주일에 4번 골프를 치는 것)가 되거나 무작정 부부동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동안 정부 1급 이상 고위 공직자들은 옷을 벗으면 곧바로 산하기관이나 유관협회 등으로 옮겨가는게 당연시돼 왔다. 그러나 현 정부에선 퇴직 고위 관료중 상당수가 4~5개월이 지나도록 '백수' 신세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공무원들이 옷을 벗자마자 산하기관에 낙하산식으로 내려가는 것을 제한하겠다"고 밝히면서부터다. 특히 예전에는 정권이 바뀌면 산하기관장들도 임기에 관계없이 대부분 사표를 내는 게 관례였지만 이번 정부에선 임기보장 원칙에 따라 올 들어 물러난 기관장을 손꼽을 정도다. 산업자원부에선 지난 5월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용퇴한 김동원 전 자원정책실장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옛 동력자원부 시절부터 자원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에너지 행정통이어서 예전 같으면 산자부 산하 수많은 에너지 관련 기관ㆍ단체장으로 바로 자리잡았겠지만 '세상'이 달라진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선 지난 3월 퇴임한 윤영대 전 부위원장이 집에서 쉬고 있으며 5월 사직서를 낸 박상조 전 상임위원(1급)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종교단체에서 봉사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경제부 등 이른바 '힘있는 부처'도 예외는 아니다. '모피아'(재경부의 영문명 MOFE와 마피아의 합성어)로 불리던 재경부에선 신동규 전 기획관리실장이 지난 4월 물러난 뒤 별다른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최근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등 만학에 빠져 있다. 재경부는 신 전 실장을 수출입은행장 물망에 올려놓았지만 이영회 수출입은행장이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 진출이 확정되기 전까진 자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당장은 여의치 않다. 최근 용퇴한 건설교통부 1급 3명도 갑자기 용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앞길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 상황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퇴직자는 "지인들로부터 위로전화가 폭주하는 것을 보니 그만둔게 실감이 난다"고 토로했다. 정보통신부에서도 이교용 전 우정사업본부장(1급)이 임기가 끝나 물러났지만 아직 특별한 자리를 맡았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국세청에서는 봉태열 전 서울청장이 퇴임 후 역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공기업을 관할하는 기획예산처의 남광수 재정개혁국장은 "다른 부처로부터 공기업 사장이나 산하기관장 인사에 협조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남 국장은 "산하기관장이 특별한 귀책사유가 없으면 임기중 경질하지 않는다는 방침과 내부승진이 늘어난 것도 관료출신이 공기업 등에 곧바로 가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관료사회의 전관예우 전통이 약해졌다고 보기엔 이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부 고위 관료들이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기업에 고위직으로 입성한 사례가 있고 퇴임 후 6개월간 유관분야 취업 제한이 풀리면 속속 자리를 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용준ㆍ이정호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