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물가가 석달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높은 성장률과 함께 상대적으로 높은 물가수준에 익숙해있던 한국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방 이후 물가는 꾸준히 연평균 3∼4%씩 성장해 왔기 때문에, 연속적인 물가하락은 소비자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에서는 저성장과 함께 물가하락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경제가 디플레이션(저성장 속 물가의 지속적 하락 현상)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다수 경제 전문가들은 "디플레이션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디스인플레(디플레의 전 단계로 1∼2%대의 저 인플레 현상)로 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디스인플레는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이란 기대 때문에 소비와 투자를 지연시켜 정부의 경기활성화 대책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현상이다. ◆ 일본형 장기불황 우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게이오대 교수는 30일 재정경제부가 주관한 '참여정부의 경제비전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세계 경제는 초저금리로 인해 인플레율이 하락하는 '디스 인플레' 현상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21세기 들어 급격한 기술 개발과 설비투자 확대로 인한 공급과잉 문제가 미국과 독일 일본 중국 등 주요 경제국들을 저물가의 늪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한국도 이같은 '디스인플레' 내지 '디플레'의 세계적 공조화(共調化) 현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씨티그룹은 최근 한국의 올해 성장률을 종전 4.1%에서 2.2%로 낮추면서 "세계적 디플레에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 경제가 성장둔화를 겪으면서 최소한 디스인플레를 겪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제정본 통계청 물가통계과장도 석달째 물가가 떨어진데 대해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와 농축수산물의 공급 부족으로 채소류 가격의 이상 급등 현상이 해소되면서 물가가 하락하는 과정"이라고 분석하면서도 "경기침체로 수요가 줄면서 품목별로 가격 하락폭이 예상보다 큰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은 5월중 생산과 투자, 소비가 외환위기 후 4년7개월만에 한꺼번에 마이너스 성장(전년동월 대비)했다고 지난달 26일 발표했었다. ◆ 하반기 물가하락 요인 더 많아 성명기 한국개발연구원(KDI) 전문연구원은 "아직은 디플레보다는 인플레 우려가 크다"고 전제하면서도 일단 하반기 중엔 △이라크 전쟁 후 국제 유가안정 △약달러 기조 속의 환율하락 등으로 물가폭등 요인은 없다고 지적했다. 재경부도 하반기 임단협 결과가 변수이긴 하지만 물가 안정세가 이어질 것으로 자신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집값이 본격적으로 하락, 디플레를 앞당길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부동산 컨설팅업체인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4월18일 이후 서울지역 전셋값이 10주째 하락세를 계속하고 있다. ----------------------------------------------------------------- [ 용어풀이 ] 디플레이션(deflation)ㆍ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디플레는 통화 유통이 위축되면서 성장이 둔화되고 물가는 하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 전 단계가 디스인플레다. 물가가 마이너스는 아니지만 2분기 이상 1~2% 내외의 낮은 상승을 기록하는 현상이다. 물가 하락 기대 때문에 소비와 기업투자가 지연된다는 점에서 경기침체를 가속화하는 부작용이 있다. 박수진 기자 park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