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달인'이란 표현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안 좋은 말로 들린 모양이다. '사람에 따라 같은 말도 이렇게 달리 들릴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이 왔다. 누가 나한테 그런 말로 칭찬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자신도 없다. 내가 다녔던 미국 대학원에서 박사자격시험은 말하자면 치열한 토론마당이다. 4과목에 대한 필기시험을 본 뒤,담당교수 4명이 나를 앉혀 놓고 토론을 통해 학자로서의 자격을 검토하는 방식이다. 난 필기시험엔 단번에 합격했지만,이 구술시험(토론)에 실패했다. 1년 뒤 다시 구술시험을 보게 됐다. 그러나 그 구술시험에서도 떨어졌고,그것은 퇴교를 뜻하는 청천벽력 그것이었다. 미국에 유학간지 5∼6년,아들과 딸 하나씩을 낳은 뒤의 일이었다. 그 낙방의 경험이 얼마나 쓰라린 것이었을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충격 속에서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시험 진행과정에서 학과가 저지른 사무상의 실수를 발견하고,그것을 '물고 늘어져' 겨우 낙방 결정을 번복시킬 수 있었다. 그런 번복 조치는 극히 드문 일인데,아마 나를 불쌍히 여긴 교수들이 눈감아 줘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나는 그렇게 학위를 얻고 귀국해 평생을 대학 교수로 지내고,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다. 당시 내 모자람은 토론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적 교육 때문이었다. 우리 교육은 예나 이제나 토론을 통해 수업이 진행되는 일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교육받고 자란 내가 미국 갔다고 갑자기 토론에 익숙해질리가 없다. 게다가 영어가 짧으니 영어로 하는 토론이 잘 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일생일대의 실패이래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지금은 영어로 강의를 하는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토론만은 여전히 하수 가운데 하수를 면치 못한다. 그러니 남에게 '토론의 달인'이란 소리 한번 들어 보고 싶을 지경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말이란,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번 대통령과 검사들의 토론은 원래 제목이 '토론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토론이라면 좌석 배치가 그렇게 되어서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토론이란 대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할 터인데,인사권자인 대통령과 그 인사권 행사의 대상이랄 수 있는 젊은 검사들이 어떻게 대등한 토론을 할 수 있을까? 내 인상으로는 대화 처음에 '토론의 달인'을 말한 것도 그 검사가 듣기 좋으라고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으리란 느낌인데,본인에게는 그렇게 안 들렸던 모양이다. 문제는 그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데 있다. 말을 두고 벌어질 해석의 차이는 언제 어디서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회에 말이 튀다가 어느 쪽이건 걷잡을 수 없는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까? 앞으로 대통령은 그런 '토론'은 안했으면 좋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이왕 대통령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대통령(大統領)'이란 말 자체가 토론의 대상이 돼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북한도 그런 말 안쓰고,중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중국에서 외국의 국가수반은 그렇게 부른다. 이 말은 일본의 철학자 서주(西周:니시 아마네 1829∼1897)가 그 제안자인 듯하다. 네덜란드에 유학했던 그는 1865년 귀국해 제15대 장군(將軍:쇼군) 경희(慶喜)의 고문으로 쇼군 중심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는데,그 때 쓴 말이 '일본국 대통령'이다. 당시 쇼군이 '일본국 대통령'이 되지는 않았지만,그 말은 그 후 한자문화권에 퍼졌다. 일본에는 '대통령'이란 없으니까,'라면 대통령'이란 불경스런(?) 상호가 사용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서양 단어 프레지던트(President)를 옮긴 것인데,서양에서는 그 표현으로 회사의 사장 등등 여러 가지 대표를 모두 지칭한다. 하지만 대통령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수반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이런 말의 사용 자체가 제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토론해 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