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相民 칼럼] '인수위불안' 피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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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김석중 상무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목표는 사회주의'라고 말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에 대해 인수위가 보인 민감한 반응은 이래저래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대변인의 유감표명 정도로 넘어가도 좋을 사안같은데,'합당한 조치'를 요구하고 전경련측의 사과성 해명이 있고 난 뒤에도 사과는 수용하되 '성의있는 조치를 기대한다'며 토를 달고 있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것은 우선 '사회주의'라는 표현에 대해 아직도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수위도 대충 넘어갈 수 없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인수위에 대한 '불안한 시선'이 팽배해 있는 터이고 보면 이를 증폭시키지 않기 위해 어쩌면 지나치다고 할 정도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을 것같다.
그 과정이 어찌 됐건 이번 일로 인수위의 목표가 사회주의가 아니란 게 분명해졌다는 것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렇지만 인수위에 대한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됐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결코 극소수의 기업인들에게만 국한된다고 보기도 어려운 불안감,그것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나 새 정권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나라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왜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인수위로 인한 혼란은 그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수위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증폭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법 개정이 선행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사안인데도 과거에 썼던 논문을 되풀이 강조한 일부 인수위원은 학자로서 소신파일지는 모르겠으나,행정부를 인수하기 위한 공인으로서의 인수위원 기능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해당부처로부터 보고를 받다가 뛰쳐나갔다는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현황을 파악하고 새 정부 정책기조를 선정하기 위해 설치된 인수위에 위원으로 들어간 사람이 보고내용이 자기 소신과 맞지 않는다고 뛰쳐나온대서야 도무지 될 말이 아니다.
인수위는 그 성격을 감안하면 새 정부에서 장관을 맡을 사람들로 구성하는 게 바람직하다.
인수위원들이 조직ㆍ기능ㆍ예산 현황 및 주요 정책을 파악한다고 부산을 떨다가 장관은 딴 사람이 기용돼 각 부처별로 또 같은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장관을 할 사람,다시 말해서 이론과 경험을 함께 갖춘 인사들로 인수위원회가 구성됐더라면 재계의 불안감은 훨씬 줄어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기업경영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증시쪽에서 자주 통용되는 '드러난 악재는 이미 악재가 아니다'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름도 처음 듣는 사람,그들이 '구호'라고 하는 게 차라리 걸맞을 지도 모르는 정책목표만 제시할 뿐 방법론은 설득력있게 내놓지 못한다면 불확실성을 넘어 불안과 걱정이 팽배할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동일 노동ㆍ동일 임금'은 명목상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이 제시되지 않는 한 구호일 뿐 정책일 순 없다.
또 법으로 그것을 강제한다고 해서 다른 부작용 없이 될 일도 아니다.
비정규직 근로자 대량실업을 부를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따뜻한 가슴과 냉정한 머리는 경제정책 당국자가 당연히 갖춰야 할 필요조건이지만 결코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경험이다.
동기가 순수하고 논리적으로도 그럴 듯했지만 결국 부작용만 결과한 숱한 선례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집 없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전ㆍ월세 폭등의 고통을 배가시켰던 주택임대차보호법도 그렇고,토지공개념 8ㆍ3조치 등 시장에 반하는 개혁조치의 실패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었던 경험자들이 여전히 긴요하다.
인수위로 인한 더이상의 혼란을 막으려면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에 경륜있는 경제장관을 내정ㆍ발표하는 것이 방법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안정감있는 인수작업을 벌여나간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똑같이 '아니오'라고 말하더라도 이 사람이 말하는 것과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이 전혀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는 결코 적지 않다.
노 당선자의 대선공약이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현실감 결여, 곧 경험은 없고 이론에만 치우친 편향성 때문에 더 불안하게 비쳐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