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제가 정착되고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우리나라에만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없어도 된다"(2001년 8월30일 21세기경영인클럽조찬에서, 강봉균 당시 KDI 원장) "출자총액제한제는 원칙적으로 폐지돼야 한다. 그러나 일부 기업이 수익성 중심이 아니라 문어발식 확장으로 투자하고 있어 탄력성있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2001년 11월21일 야.정 정책간담회에서, 진념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규제다. 현정부에서 부총리를 지낸 두 사람이 모두 인정한 대로 '언젠가는' 폐지돼야 할 한시적인 제도다. 정부는 실제로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98년 이 제도를 폐지했었다. 외국업체들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에 대비해 국내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9년 대기업 부문 구조조정 미진을 지적한 김대중 대통령의 한마디에 되살아났고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이 제도를 유지하겠다고 공약해 놓은 상태다. 재계도 반대하고 정부 일각에서도 폐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도 한동안 '우리나라만'의 규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만의 규제인 만큼 우리 기업들만 이 제도에 따라 묶이게 된다. 정확하게는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한국전력 삼성 LG SK 등 상위 19개 기업집단이다. 이 가운데 공기업이나 공기업 성격이 남은 기업들을 빼면 삼성 LG SK 현대 한진 한화 두산 동부 등 국내 상위 그룹들이 집중적인 표적이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이 제도가 없으면 예전처럼 비관련사업까지 문어발식 다각화에 나서는 기업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불신이 높은 것이다. '잠재적인 부당 행위 세력'으로 대기업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부 기업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국내 대기업그룹을 옭아매는 것은 명분도 적고 실리도 없다. 명분을 보자. 문어발식 확장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이 제도 뿐일까. 상호출자금지, 상호채무보증규제, 부채비율 2백% 미만 유지 등의 제한이 있고 사외이사제도 정착돼 가고 있다. 제도가 없더라도 주거래은행이 투자 및 업종 선택을 관리토록 하면 된다. 역차별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글로벌 시대인 만큼 국내에 진출해있는 외국 기업의 경우 덩치면에서 이들 19개 기업집단에 비해 훨씬 우위에 있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이들 업체는 규제대상이 아니다. 실리적인 측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내 정상급 기업들의 투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국민경제적으로도 분명 손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총 투자액의 약 25%를 차지하는 30대 기업집단의 설비투자가 10% 축소되면 경제성장률은 약 1.5%포인트 정도 둔화된다. 현재 출자총액규제대상 19개 대기업집단 소속 계열사는 다른 국내 회사의 지분에 투자할 수 있는 한도가 순자산의 25%로 제한받고 있다. 때문에 유망한 신규사업에 타이밍을 맞춰 진출하기가 쉽지 않다. 인수.합병 등을 통한 구조조정도 지체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투자 확대를 통한 경제활성화를 기대하면서 그 주체들을 묶어두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에서는 지난해 공정거래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관련 다각화나 성장산업진출의 경우 예외 적용 대상을 넓혔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해당기업으로서는 여전히 불만이다. 특히 '관련된 업종'의 기준이 예전 60∼70년대에 만들어진 표준산업분류를 따르고 있어 관련 다각화를 해도 비관련 다각화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지배구조가 눈에 띄게 개선되고 투명성이 높아지면 이런 규제는 폐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자주 밝혀 왔다.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성 등의 수준은 그러나 자칫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오히려 시장이 평가할 문제다. 출자총액제한 대상 기업집단들이 세계적인 평가기관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이들 기업을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을 두고 옭아매는 것은 명분도 실리도 부족하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