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안보환경이 심상치 않다. 갑자기 불어닥친 북핵 폭풍의 조짐도 좋지 않다. 마치 그간 떠돌던 '2003년 위기'가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북한의 현재 목표는 북.미간 대타협이다. 1994년 위기를 조성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미국과의 타협 여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조선반도에서의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우리의 시종일관한 입장'이며, '우리가 핵시설들을 다시 동결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려 있다'는 핵시설 전면 재가동 선언에 그런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얼핏 '한판 붙자'는 선전포고 같이 들리지만, 이 선언엔 초강수를 펴는 북한의 조급함이 짙게 배어 있다. 북한은 대미협상을 통해 '불가침 협정'만 맺게 되면 체제부활의 결정적 찬스를 얻을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있다. 그만큼 북한의 생존과 미국이 직결돼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체제생존을 보장받지 못하고선 어떤 노력도 헛될 수밖에 없음을 김정일은 잘 알고 있다. 경제특구나 경제관리개선조치 등의 성패도 결국은 미국의 대북 조치에 달려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북.미경색 국면을 활용, 시간만 끌고 압박하는 미국의 주목을 단번에 끌기로 작정한 것이다. 켈리 방북 때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핵 개발 시인 의도를 밝히고, 스커드 미사일을 실은 배를 중동에 내보낸 것도 이런 의도에서 비롯됐다. 이라크 제재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의 관심을 끌어 체제보장 약속만 받아낸다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조선을 상대로 '통일강성대국'의 길을 모색해 볼 수 있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다. 이제 주사위는 미국으로 넘어가 있다. 그리고 문제는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부시 정부가 북한의 이런 벼랑끝 전술을 과거 클린턴 때처럼 받아들일 것인지, 긴장을 단계적으로 고조시키면서도 협상의 명분을 쌓아가고 있는 북한을 어떤 식으로 응징할 것인지, 또 '타협 절대 불가'를 천명한 지존의 권위를 야금야금 파고드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어떤 명분으로 응할 것인지 세계의 이목은 미국에 쏠리고 있다. 미국으로선 이라크를 다루는 식으로 북한을 다루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대외의존도가 낮은 북한에는 경제제재도 별 효과가 없다. 무력으로 위협하려 해도 중국과 러시아가 선뜻 찬성할 리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서울이 북한군사력 앞에 인질이 돼 있는 상황에서 핵시설을 폭격, 외과적으로 도려내는 수술도 시도하기 어렵다. 더욱이 남쪽은 지금 새 지도자를 뽑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한반도 문제를 미국 일방주의로 끌고 가는 것도 무리다. 설상가상 반미 정서가 팽배해 가고 있어 섣불리 건드리다간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목표가 분명한 북한은 미국의 주목을 끌기 위한 후속조치를 연이어 취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원자력기구 감시원 활동을 제약 또는 추방하고, 핵동결 봉인 파기 및 영변 원자로 재가동 같은 긴장고조 행동을 계속하면서 미국 태도를 지켜 볼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제3자의 중재다. 중국이든 러시아든, 아니면 일본이든 누군가 북.미간 대화와 협상을 위한 자리를 펴줘야 한다. 우리 정부가 적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우리 생각이다. 우선 북한이 인정하지 않는다. 한반도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미국과 자신 뿐이라는 구도를 견지해 온 북한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또 대선정국으로 인해 주도권을 쥐고 이 문제를 끌고 갈 마땅한 정치주체도 없는 상황이라 새 지도자의 지휘체계가 자리잡을 때까지는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한데도 능력과 처지가 안 되는 것이 답답하다. 결국 평화란 '강한 자가 선할 때', 그리고 '선한 자가 강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미국이 세계경찰의 지위를 남용해 악해지지 않도록 설득하면서 선한 우리가 보다 강해질 수 있도록 지금부터 안보체계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다음 지도자의 현명한 위기관리능력을 기대한다. < kimchi122@naver.com > -----------------------------------------------------------------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