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로 변한다'는 고사가 있다. 같은 식물이라도 기후와 풍토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최근 말 많은 공정공시(Fair Disclosure)제도를 보면 '귤과 탱자' 얘기가 떠오른다. 공정공시는 미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에서 두번째로 도입한 선진제도다. 특정 기업이나 애널리스트,기관투자가 등 '힘있는 세력'에 의한 정보독점 문제를 푸는 '정보 평등주의'를 뼈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를 들여와도 수용하는 쪽의 자세와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부작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증권업계에서 공정공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융감독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상장·등록기업의 70% 가량이 공시전담조직을 갖고 있지 않다. 내부정보관리 시스템도 열악하고 공시의 중요성에 대한 최고경영자(CEO)의 인식도 낮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정공시가 도입되자 적지않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정보량은 2배로 늘었다지만 '알맹이'가 없다는 게 투자자들의 지적이다. 기업들도 관련규정이 복잡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입단속'을 강화하고 언론 취재에도 '모르쇠'로 일관하기 일쑤다. 기업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애널리스트도 '입과 발'이 묶이고 말았다. 금감원 내부에서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제도를 도입한 의도를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공정공시 운영기관인 증권거래소와 코스닥시장은 '덤터기'를 썼다며 억울한 표정이다. 공정공시제도 자체는 훌륭하다. 정보독점과 왜곡현상을 바로잡고 정보분석능력이 뛰어난 애널리스트의 '몸값'을 높여 '옥석'(玉石)을 가려주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많이 다르다. 공정공시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면 투자자와 기업의 문화부터 바뀌어야 한다. 여기에는 적잖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공정공시가 시작되면서부터 증시가 맥을 잃고 있다"는 한 증권맨의 비아냥을 금융당국은 새겨들어야 한다. 남의 것이 좋다고 진지한 고민과 노력 없이 무조건 베끼기만 할 일은 아니다. 이건호 증권부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