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지난해 세상을 뜨셨다. 나는 한동안 복받치는 회한으로 많이 울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세월은 굴곡도 많았지만 운도 따라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은 해방된 이듬해 부산에서 국수를 만들어 시장에 팔았다. 사업의 출발점이다. 아버지 혼자 공장을 운영했다. 내가 성장하면서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다. 시장을 돌며 국수를 배달하고 수금하고... 이렇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 덕에 6.25전쟁으로 궁핍할 때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우리집에 위기가 닥친 때는 지난 1966년. 아버지가 공장매매 문제로 3년간 소송에 휘말리면서 회사문을 닫아아만 했다. 우리 가족은 보따리짐을 들고 한여름에 야반도주해 용산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여덟식구가 함께 잠자기엔 비좁은 단칸방에서,나는 둘째 동생과 함께 잔디밭에서 거적을 덮고 잤다. 서울생활은 끼니를 때우는게 가장 큰 일이었다. 낡은 기계로 만든 뻥튀기과자를 팔아 하루하루를 살았다. 가족들은 만들고 나는 서울 인천 수원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팔았다. 뻥튀기 기계가 처음 1대에서 4대로 늘었다. 하지만 뻥튀기 장사로는 식구들을 먹여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상의 끝에 국수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 때가 스물네살이 되던 1969년이다. 뻥튀기 기계 판돈과 그동안 모은 돈으로 국수기계 한대를 구입했다. 국수를 뽑았지만 단골이 없어 며칠동안 하나도 못팔았다. 얼마뒤 기회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경남상회 강 사장(이름모름)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강 사장은 내가 만든 국수를 처음으로 사준 고객이다. 게다가 강 사장은 보증까지 서가며 밀가루 5백포를 지원해 줬다. 이때부터 생산과 판매가 늘었고 자고나면 기계가 한대씩 공간을 채워나갔다. 그러나 1975년 또 한번의 위기를 맞았다. 내가 변호사법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져 회사문을 닫아야만했다. 이듬해 출소한 후 농산물유통에 뛰어들었다가 2년6개월여만에 전재산을 날리고 "빚잔치"를 하기도 했다. 1979년 초로 기억된다. 낙담하고 있던 나에게 장인이 어려운 살림속에서 집을 담보로 마련한 1천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를 사업밑천 삼아 재기에 나섰다. "국수왕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시장에 퍼지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커나갔다. 공장이라고해야 보잘것 없지만 어쨌든 6개월여만에 전국 최대의 국수생산 공장이 됐다. 이때부터 체계적인 경영을 시작했다. 늘어나는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1991년 파주에 대규모 공장을 설립했다. 행운도 뒤따랐다. 그해 쌀국수를 개발하면서 식품업계의 리더로 성장했다. 쌀국수를 개발해 남아도는 쌀을 소비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도 받았다. 장기 보관이 가능한 주정살균법을 개발해 국내 식품산업 발전을 한단계 높이기도 했다. 나는 1백여곳이 넘는 고아원을 돕고 있다. 지난 5월부터는 신의주에 국수 기계와 재료를 보내 북한 어린이 5천명에게 매일 한끼의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나를 도와준 강 사장에 대한 직접적인 보답 대신에 이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