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17일.고종이 정사를 보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명전권대사로 파견하면서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을 우리 조정에 전달했는데 고종과 모든 대신들은 이날 최종적으로 반대의견을 모은 것이다. 이를 전해 들은 이토와 일본군 사령관인 하세가와는 헌병 수십명을 동원해 중명전을 둘러싸고 우리 대신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던 탁지부대신 한규설을 옆방에 억류했으며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학부대신 이완용 등으로부터는 결국 승인을 받아냈다. 이날 오후부터 시작된 강요는 다음날 새벽 2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당시 고종은 참담한 심정으로 중명전의 2층 침소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소위 '을사조약'은 이렇게 체결됐다. 그러나 이 조약은 정식명칭이 없을 뿐더러 왕의 재가가 없어 원천적으로 무효였음은 물론이다. 주권상실의 진원지인 중명전이 보존된다. 서울시는 최근 "일본 식민통치의 시발지였던 비운의 현장을 되살리기 위해 중명전 건물(2백37평)과 부지(7백27평)를 사들여 근세사 전시시설로 조성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중명전은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궁궐내 서양식 벽돌건물이다. 당초 외교사절단의 연회장 겸 접견소로 지어진 이 건물은 아치형 창과 베란다가 특징이다. 황태자인 순종과 윤비(尹妃)의 혼례도 여기에서 치러졌다. 일제는 이 건물을 외국인에게 임대했고 '경성구락부(Seoul Union)'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까지도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돼 왔다. 원래 중명전은 덕수궁 서편 경내에 있었지만,일제가 의도적으로 석조전 사이에 도로를 만들면서 이를 분리해 지금은 덕수궁 뒷 담벽에 붙어 있다. 1925년에는 불이 나 복구하기도 했다. 영친왕비인 이방자(李方子) 여사의 소유이기도 했던 이 건물은 현재 민간회사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비운의 역사현장이 뒤늦었지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 반갑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