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내가 바라게 된 것들 .. 金香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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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문득 내게는 늘 소년처럼만 여겨지던 아들이 3년 후면 서른이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서른-.그 순간 아들의 어깨 위에 너무 많은 짐이 올려지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 들면서 아들이 안쓰럽게 여겨졌다.
이제 머지않아 한 여자의 남편과 직업인으로,그리고 또 아버지로 살아갈 아들.
그 모든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은 모든 엄마들의 영원한 숙제인 듯 아들이 어른으로서 살아야 할 날들의 무게에 자주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대학입학시험을 앞두었을 때에는 '공부 잘하라'는 당부만 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남편 노릇,직업인으로서의 자세며 아버지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것도 조금씩 알려 주어야 할 것만 같아 '참 부모 노릇엔 은퇴 시기란 없는 거구나' 싶다.
대학에만 들어가면 부모 노릇도 끝날 것 같았지만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만의 말씀이란다.
초보 어른이 되어 어른 역할을 배워 나가는 자식들을 지켜보는 일의 어려움은,대학입시 때와는 또 다른 힘든 일이라고 한결같이 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의 두서너해가 가장 마음이 편했던 시기였다.
아이들이나 부모 모두에게 주어졌던 일종의 휴가 기간이었던 셈인데,휴가란 결국 끝나게 마련이라 다시 두 아이들의 진로며 결혼이란 문제가 닥쳐 온 것이다.
대학 졸업장이란 게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 노력의 결산이었다면,앞으로의 날들은 대학 입학 후의 노력에 따라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그리고 직업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삶의 동반자를 찾는 일은 그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직 자신의 일을 잡지 못한 아들만이 아니라,내년 봄 대학을 졸업하는 딸한테도 "서른이나 마흔 오십엔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 갈 것인지 그림을 그려두기라도 했느냐"는 잔소리를 자주 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덤으로 느끼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열여덟해 뒤엔 내가 일흔이 된다는 사실이다.
아들이 서른이 된다는 게 안쓰러움을 자아냈다면 나 자신 일흔이 된다는 것은 벼랑 쪽으로 좀 더 다가간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일흔 뒤의 날들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날들이며,일흔 뒤의 삶을 훌륭하게 꾸려가는 분들도 주위에 적지않다.
그런데도 나에겐 일흔이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마지막 방어 벽'으로 여겨진 탓에 일흔이 되기까지의 열여덟해가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진다.
이 열여덟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삶의 마지막 날에,살아온 하루 하루의 소중함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달력 속의 숫자로만 여겼다는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지금까지도 소중했던 분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삶의 유한함을 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 자주 갈 일이 있어 자신의 두 발로 가고 싶은 곳 어디나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남은 열여덟해에 대한 뒤늦은 자각은 그것들보다 한결 생생하게 삶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안겨 준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쁨을 안겨주기만을 기다리기 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과 위안이 될 수 있기,나 자신과 타인에게 너그러워지기,아이들과 좋은 추억 만들기,이런 것들이 얼마 전부터 내가 바라게 된 것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나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존중하기.
아이들과의 행복한 추억 만들기는 우리 아이들과 그들의 아이들과의 인연을 생각할 때 더없이 소중한 기쁨이리라.그리고 자주 연락하고 대화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작은 못마땅함을 흘려 보내며 나와 내 주위사람들에게 더욱 관대해지리라.
더불어서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존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엄마 노릇,아내 노릇 하느라 가장 뒷전에 밀려나 있어야 했던 게 나의 감정이라는 것이었으니.
남편이,자식들이 어떻게 해주길 기대하다 서운해하기 보다 스스로 나의 감정을 존중하는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