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인가. 서방진영 학자로는 첫 교환교수로 북한에 체류했던 재일동포 이영화 간사이(關西)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북한은 최소한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사회주의와는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었다는 주장이다. 90년대 초반 북한 사회과학원 교환교수로 평양에 1년간 다녀온 직후 그가 쓴 책,'북조선,비밀집회의 밤'에는 북한의 체제 모순에 대한 비판이 가득 담겨 있다. 골수 좌파 경제학자인 그가 '사회주의 조국'에서의 유학을 통해 얻은 것은 '체제'에 대한 배신감뿐이었다고 토로한다. 사회주의 경제학에 대해서는 단 한 순간도 연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시종일관 '위대한 영도자'에 대한 세뇌교육에만 시달리다 돌아왔다는 것이다. 북한 경제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평양 중앙도서관을 숱하게 방문했으나 저명한 사회주의 학자들의 이론서들이 한결같이 '불온서적'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돼 있더라고 그는 증언한다.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마저 금서(禁書)로 구분돼 대출이 금지돼 있더라는 대목에서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수소문 끝에 그는 '자본론'이 중앙도서관 소장본 외에도 북한 내에 필사본으로 한 권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제 비판적인 일부 경제학자들이 목숨을 걸다시피 중앙도서관 소장본을 조금씩 필사해 완성한 '수제(手製) 자본론'이다. 그곳 당국자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체제모순과 '투쟁'한 그의 모습에 감동한 그곳 경제학자들은 그가 북한을 떠나는 날,비장한 당부와 함께 뜻밖의 선물을 건넨다. 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베껴 만든 책,'자본론'이다. "사회주의를 포기한 이 나라에 이 책이 머물 이유는 없소.일본으로 돌아가면 우리의 실정을 똑바로 알려주시오."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의 내용을 되새겨본 것은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북한의 개혁·개방 관련 '변신'에 대한 판독법을 어쩌면 이 책이 가장 잘 알려주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요 몇 주일 사이에 북한발(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뉴스들은 어지럼증을 느끼게 할 정도의 메가톤급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전격적인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본격적인 대외 개방·개혁 의지를 드러내더니 신의주를 통째로 떼내 홍콩식 자유무역도시로 개방한다는 선언으로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이런 변신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이냐다. 북한이 애초부터 '무늬만 사회주의'인 국가였다면 작금의 자본주의 실험을 '이념'의 프리즘만으로 들여다볼 경우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보다는 누적된 경제 피폐와 국제적 고립 등으로 정권의 위기를 맞은 북한의 '체제 보전'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따져 들면 북한이 열악한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신의주를 특구로 지정한 까닭에 적잖은 의문이 제기된다. '체제 수호'라는 안전장치를 유지하면서도 서방세계를 안심시킬 '개방'의 외양(外樣)을 띠는 데는 평양과의 종심(縱心)이 먼,외딴 국경도시가 제격이었을 것이라는 분석은 새길 만하다. 북한이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외부세계와의 대화 물꼬를 텄다는 사실 자체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변화의 속내를 제대로 읽어내고,대처하는 건 또다른 우리의 몫이다. 대선을 앞두고 구심점 공백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의 정치 리더십이 북한의 '인치(人治) 플레이'에 놀아나는 일이 없기 위해서도 북한의 개방 드라이브에 대한 다각적이고도 면밀한 분석이 절실한 시점이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