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낮.베이징발 항공기가 나리타공항에 착륙했다. 잠시 후 트랩을 내려 온 백발의 노신사가 서둘러 출구를 빠져 나왔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만 말을 아낀 채 황급히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승용차가 쏜살같이 간 곳은 도쿄 우치사이와이의 도쿄전력 본사 건물. 노신사는 원자력발전소 사고은폐와 점검기록 허위기재로 일본열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도쿄전력의 아라키 히로시 회장(71)이었다. 일본 아시아교류협회의 중국방문 대표단장으로 베이징에 가있던 그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미나미 노부야 사장 등 임원들과 대책 마련을 논의했다. 하지만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일본 언론은 '죄송하다'며 연일 머리를 숙인 아라키 회장과 미나미 사장이 사임 의사를 공식 표명한 데 대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민들이 받은 충격의 강도와 분노를 감안한다면 두 사람의 사임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은폐·허위기재의 시발점이 지난 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사례도 29건에 이르는 점을 감안할 때,당시 경영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성토하고 있다. 도쿄전력은 덩치도 덩치지만,경영진들의 무게에서도 일본 재계의 리더이자 버팀목 역할을 해 온 기업이었다. 역대 사장들 중 히라이와 가이시 상담역(88)은 일본경제단체연합회 명예회장으로,나스 쇼 상담역은 이 연합회 평의원회 의장으로 재계를 대표하고 있다. 아라키 회장은 경제단체연합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기업행동위원장으로 도덕과 윤리를 앞장서 촉구해 온 터였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일본 경제 저력의 하나로 '정치는 엉망이어도 기업은 건강하고 근면하다'는 점을 꼽아 왔다. 그러나 도쿄전력 사태는 기업 윤리의 총체적 실종이라는 내부 시스템의 붕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일본 신문들은 '도쿄전력은 물론 미쓰이와 닛폰햄의 경영진도 자신들의 회사와 관련된 스캔들과 불상사로 인해 사퇴한다'는 기사로 가득 메워졌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