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후 2시 해인사 경내.고요한 산사에 공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삼귀의(三歸依) 소리와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진주했던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군의 명령을 거부,팔만대장경과 해인사를 구해낸 고 김영환 장군(1921∼54년)을 기리는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제막식에서다. 김 장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18일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 공군으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인민군 낙오병 9백여명이 가야산 일대에 숨어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대장이던 김 장군(당시 대령)은 명령 이행을 거부한 채 미 군사고문단을 설득했다. 유동적인 공비 수백명을 소탕하기 위해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을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5백파운드짜리 폭탄과 로케트탄 네이팜탄을 실은 전폭기로 폭격할 경우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 장군의 편대는 해인사 대신 해인사 남쪽 1㎞ 지점의 인민군 집결지를 폭격한 뒤 귀대했다. 이때문에 김 장군은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나 2차대전 때 미군이 바티칸이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일본 문화의 총본산인 교토 등을 폭격하지 않은 전례를 들며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을 파괴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공군 창설의 주역이었으며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처음 착용한 것으로도 유명한 김 장군은 장성으로 진급한 1954년 3월 강릉 상공에서 비행훈련중 순직했다. 이날 공적비 제막식에는 김 장군의 편대원으로서 함께 출격했던 옥만호 전 공군참모총장 등 7명의 전직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60여명의 공군 예비역들과 공군 의장대·군악대 스님 신도 등 5백여명이 참석했다. 지관 스님(전 동국대 총장)은 공적비문에서 "참으로 목숨을 건 판단과 애국심으로 이룬 불멸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고 찬탄했다. 해인사=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