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의 한 법률회사 회의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측 경영진 한 명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뛰어들어와 박종섭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에게 한국의 신문과 번역본을 내밀었다. '인피니언 지분인수방안 제안'이라는 기사와 함께 인피니언측 실사단의 방한 장면이 실려 있었다. "내가 하이닉스 협상대표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나를 믿으세요." 박 사장은 "하이닉스를 인피니언에 넘길 거냐"고 추궁하는 마이크론 사람들을 다독거리느라 진땀을 뺐다. 마이크론에서 뒤늦게 허를 찔린듯 허둥댔지만, 박 사장은 2월1일 밤 울리히 슈마허 인피니언 사장이 한국을 급거 방문했을 당시 마이크론에 이 사실을 통보했었다. 마이크론은 그저 하이닉스의 협상전술이려니 가볍게 넘겼다가 두 회사간 협상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자 아연 긴장한 것이었다. 하이닉스의 인피니언 카드가 구체화되면서 협상 주도권은 하이닉스로 넘어왔다. 2월13일 귀국하는 박 사장의 손에는 총 인수대금을 40억달러로 올린 양해각서(MOU) 초안이 쥐어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하이닉스에 인피니언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 협상 상대였다. 마이크론은 자산만 인수하려고 했던데 비해 인피니언은 하이닉스의 실체를 그대로 남겨놓는 지분참여 방식을 제안했다. 또 미국 정부를 믿고 배짱을 부렸던 마이크론과 달리 진지하고 적극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인수가격도 38억달러를 제안하는 등 모든 면에서 마이크론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 D램 시장점유율이 10%가 채 안되는 인피니언으로서는 스스로 몸집을 불릴 필요가 절실했을 뿐만 아니라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결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D램업계의 2위부터 4위를 차지하고 있는 마이크론 하이닉스 인피니언 3자가 벌이는 '짝짓기 게임'이 카드게임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이크론과 인피니언 카드를 양손에 쥔 하이닉스의 매각협상은 순탄한듯 보였다. 그러나 기자들을 헤치고 공항을 빠져 나오자마자 그에게는 인피니언이 이사회에서 하이닉스와의 협상을 부결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노조가 절반을 차지하고 지역사회 대표와 주주들이 참여하는 인피니언 이사회는 '양사의 제조방식이 달라 기술측면의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매각협상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덩달아 마이크론과의 협상도 꼬이기 시작했다. 경쟁상대가 없어진 마이크론 진영내에서 '가격을 너무 올렸다' '하이닉스의 전술에 말렸다'는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더욱이 D램 가격이 연일 폭등해 2월 중순에 이미 1백28메가 기준 D램 고정거래가격이 개당 4달러 중반 수준으로 치솟고 있었다. 마이크론으로서는 D램 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면서 하이닉스 공장을 인수할 절박성이 줄어들었다. 하이닉스.마이크론간 흥정은 매각대금과 협상의 구조만 정해졌을 뿐 세부적인 협상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마이크론이 제시한 MOU의 세부내용을 검토하고 조목조목 밀고당기는 협상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의 협상팀은 MOU에도 불구, 협상 결과에 따라서는 40억달러라는 총 매각대금이 아무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때까지 실감하지 못했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2월 초까지는 가격을 중심으로 논의했다"며 "나중에 세부조건 협상에서 보다 많은 문제들이 드러났다"고 회고했다. 하이닉스 구조조정특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마이크론과의 협상이 좀더 진전될 때까지 인피니언이 시간을 끌어줬더라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인피니언 카드가 날아가버린 데다 가격에만 집착했던 서툰 초기협상 전술,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 등이 겹쳐 협상은 계속 꼬여만 갔다. 김성택.하영춘 기자 idnt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