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팔짱 낀 정부 .. 이학영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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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정부A'가 아닌 '정부B'라는 말이 있다.
노사정위원회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 조직을 가리키는 얘기다.
이들 기구는 공무원과 민간인들이 섞여있는 반관반민(半官半民) 조직이다.
그러면서도 핵심 경제현안들에 대해 정부부처(정부A) 못지 않은 역할을 떠맡고 있다.
임기말에 접어든 현 정부의 마무리 개혁과제들이 이들 기구의 손에 쥐어져 있다.
주5일근무제와 공적자금이 투입된 부실기업 처리 등 민감한 이슈들이다.
현 정부는 이미 정치적으론 반신불수다.
역대 정권 최다의 '게이트'를 양산한 끝에 대통령의 막내아들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여론에 떠밀려 일찌감치 '탈당 카드'를 써먹은 대통령이 정치쪽에서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경제현안의 깔끔한 마무리야말로 그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주5일근무제는 노사간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부실기업 처리도 별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대한생명처럼 원매자와 가격 등 조건에 대한 흥정을 마친 곳까지 답보 상태다.
대학교수와 변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공자위에서 '인수기업 자격 검증론'과 '매각가격 재산정론'을 내놓으며 제동을 건 탓이다.
'정부B'의 위세에 '정부A'의 체면은 영 말이 아니게 됐다.
대한생명의 유일한 인수희망자로 남은 한화컨소시엄과 흥정에 들어간 게 작년 10월이다.
그런데 새삼스레 자격 재검증론이 불거져 나왔으니 일이 꼬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화측과 실사를 거쳐 합의한 대한생명의 인수 적정가격도 '최근의 개선된 실적에 맞춰 재산정해야 한다'는 '정부B'의 주장으로 무용지물이 될 판이다.
이미 합의된 가격을 '상황이 달라졌다'며 뒷다리를 붙잡는 데 대해서는 국제적인 소동도 빚어졌다.
한화의 컨소시엄 파트너인 일본 오릭스사가 항의 방문단을 보내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난데없는 자격 재검증론에 대해 경제부총리 등 핵심 경제부처 수장(首長)들이 '이미 걸러진 일'이라며 설득하고 있지만 '정부B'의 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부실기업에 투입된 막대한 공적자금을 한 푼이라도 더,제대로 회수하려면 인수기업의 자격과 가격을 조금이라도 더 정밀하게 따져야 한다'는 게 '정부B'의 주장이다.
원론적으로 옳은 얘기다.
그러나 엄연한 협상 상대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을 뒤집는 건 다른 문제다.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는 위원회 조직의 속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는 비판도 있지만,그걸 여기에서 구구하게 따지고 싶지는 않다.
딱한 건 '정부A'의 행태다.
책임감을 갖고 다부지게 행정을 챙기는 모습이 실종된 지 오래다.
공자위 민간위원장 선임 문제만 해도 그렇다.
민간위원들이 정부 내정 인사에 반발하며 다른 사람을 뽑는 '반란'을 일으켜 스타일만 잔뜩 구겼다.
'관선 위원장' 반대의 명분에 어울리지 않게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는 대학교수가 대타로 선임됐지만,정부는 꿀먹은 벙어리다.
강영주 증권거래소 이사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금융통화위원직 후속 인사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 노조의 '관치 낙하산 반대'에 부딪쳐 한달이 다 돼가도록 이곳저곳 눈치만 보고 있다.
다음 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아직도 9개월 이상이 남아있는데,팔을 걷어붙이고 현안을 챙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행정공백' 조짐이 벌써부터 완연하다.
정치적 불구가 된 대통령과 여론 눈치보기에 급급한 정부에 의해 민생과 경제가 멍들고 있다.
이럴 바엔 행정기능을 송두리째 '정부B'에 넘기자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 지 정말 걱정스럽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