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극우파인 장-마르 르펜 국민전선(FN) 당수를 맞아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우파인 공화국연합(RPR)당 후보라기보다 르펜 돌풍을 잠재우기 위한 '공화국 후보'로 나서 공산국가에서나 나올 법한 82%의 기록적인 득표율을 보였다. 그는 이에 힘입어 프랑스 공화국 사상 프랑수아 미테랑 전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시라크 대통령이 2차 투표에서 얻은 2천600만표의 절반인 1천300만표는 좌파 유권자에게서 나왔다. 좌파 유권자 중 4분의 3이 분루를 삼키고 그를 지지했다. 이는 시라크 개인을 선호하거나 그가 내세운 정책노선, 공약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극우파 르펜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시라크 대통령은 사상 최대의 지지를 얻고도 그에 걸맞은 정통성은 확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유권자들이 원천적으로 선택을 봉쇄당한 가운데 당선했기 때문에 향후 집권 과정에서 지지기반 약화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시라크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퇴임하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적게 얻은 19.9%의 1차투표 득표율이 입증한다. 그래서 시라크 대통령은 2차 투표에서 자신을 우파가 아닌 '프랑스의, 공화국의, 민주주의의후보'라고 자처했다. 그는 극우돌풍으로 큰 상처를 받았던 프랑스의 자존심과 국민 정체성을 회복하고 계층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통합자 겸 조정자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를 위해 대선과정에서 최대의 관심사로 드러난 치안, 범죄, 실업, 감세, 연금 등의 현안에 대대적인 개혁의 메스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범죄소탕을 위해 내무부와 별도로 치안전담 부처를 개설하고 고용창출과 경제 역동성 회복을 위해 연내에 소득세 5%를 인하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이 같은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음달 실시되는 총선에서 우파 승리를 이끌어내야 한다. 의회를 좌파가 장악하면 그는 외교, 국방 외에 경제, 사회 등 주요 내정에 대해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좌파의 국정주도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의 대선 패배 충격은 좌파의 대단결과 총선 승리를 몰고올 가능성이 적지않다. 좌파는 벌써부터 우파가 총선에서 승리하면 대통령, 상원, 헌법위원회에 이어 내각과 하원까지도 '싹쓸이'한다며 유권자들에게 견제권 부여를 호소하고 있다. 총선에서 우파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시라크 대통령은 지난 5년과 마찬가지로 좌우동거(코아비타시옹) 정부 아래서 힘없는 대통령, 의전용 국가원수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면 시라크 대통령은 제5공화국 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집권 12년 동안 제일 힘없었던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다. (파리=연합뉴스) 현경숙 특파원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