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한국을 강타한 외환위기는 그동안 국내기업들에 누적돼왔던 모든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그러나 이 시련을 삼성전자는 오히려 '축복'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삼성전자는 제품을 찍어서 해외로 실어나르고 싼 가격에 물건을 풀어놓는 수준이었다. 개별 상품의 판매광고가 마케팅의 전부였다. 그나마 지역별로 따로 놀았다. 당시 해외법인이 각기 사용한 광고대행사만 55개. '삼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공통된 이미지를 연출하지 못했다. 제품은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고 판매부진은 덤핑판매로 이어졌다. 이건희 회장은 외환위기 이전인 지난 96년 5월 "현재 C급인 삼성의 이미지를 A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룹 차원의 브랜드 전략이 수립된 것은 1년 4개월 뒤인 97년 9월,실행지침이 마련된 것은 97년 12월이었다. 원화의 대 달러 환율이 2천원대에 육박하던 때였다. 톱-다운 전략=시작은 늦었지만 처방은 신속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글로벌 CI(Corporate Identity)와 브랜드의 확립. 구조조정본부는 전자 외의 계열사가 해외에서 삼성 브랜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자 외의 계열사가 해외에서 삼성브랜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룹 '브랜드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다. 연간 1억달러 규모의 그룹 공동브랜드 마케팅 펀드도 조성했다. 스포츠마케팅은 현재 구조본에서 자체사업 예산을 갖고 집행하는 사실상 유일한 사업이다. 브랜드 전략은 철저한 톱-다운방식을 채택했다. 98년 당시 구조본이 진단한 삼성브랜드의 위상은 '저가''저품질''모방'등 이미지 '진공'상태였다. 이순동 구조본 기획홍보팀장(부사장)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을 최우선 투자대상으로 선정해 디지털기업 이미지를 심는 정면돌파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개방적이고 친근하면서도 첨단 디지털 기업 이미지를 강조하는 'Samsung digitall,everyone's invited'라는 단일 슬로건이 도출된 것도 이때였다. 올림픽 마케팅=이 회장이 올림픽파트너십을 브랜드 마케팅의 핵심수단으로 활용토록 제안한 것은 93년 6월. "올림픽과 관련있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2000년 올림픽 계획을 세워야 한다.삼성의 위상과 올림픽의 이미지가 맞아 떨어진다면 그룹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라고 강조했다. 이 지시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실현됐다. 그 기반은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마련됐다. 96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된 이 회장은 나가노 올림픽부터 무선기기분야의 공식스폰서로 경쟁사를 제치고 삼성전자를 끼워넣는데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올림픽을 토털 마케팅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2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3개월전부터 삼성전자의 전 해외법인은 치밀한 판매전략을 수립,실행에 들어갔다. 미주총괄 판매법인(STA)은 지난해 11월부터 2개월간 버라이존,스프린트 등 통신서비스업체와 올림픽을 활용한 공동 프로모션을 벌였다. 전략적 제휴관계에 있는 AOL타임워너와 온라인마케팅도 시도했다. 그 결과 전년동기보다 매출이 20% 늘었다. 중국판매법인도 'Go,Get it'을 슬로건으로 2002개의 휴대폰을 경품으로 내건 대규모 판촉행사를 주요 30개 도시에서 벌였다. 중국의 올림픽 열기를 활용한 이 행사로 지난해 11,12월 두달간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0%가 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올림픽 참가권을 내건 이벤트를 개최,휴대폰 시장점유율을 6.1%에서 10%대로 끌어올렸다. 올림픽 기간동안 솔트레이크 현지에 마련된 전시관에는 20만여명이 방문,하루 평균 1만명 이상이 삼성의 디지털 기술을 체험했다. CNN CBS NBC 등 세계적 언론에도 소개됐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의 브랜드 인지도를 89%까지 끌어올렸다. 이외에도 아시안게임,LPGA투어(골프),네이션스컵(승마) 등 다양한 스포츠행사를 통해 '삼성=세계적 첨단기업'이라는 공식을 쌓아나갔다. 제 값 받기와 MDC(Market Driven Company)=선견(先見) 선수(先手) 선제(先制) 선점(先占).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디지털 사업전략으로 신봉하는 4가지 원칙이다. 시장변화를 먼저 보고,남보다 한 발 먼저 움직여서,경쟁사를 제압해,시장을 먼저 차지한다는 의미다. 디지털은 삼성에 아날로그시대의 후발주자라는 '원죄'를 벗고 선진기업과 동일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게 해줬다. 휴대폰 핸드PC 디지털TV DVD플레이어 등 시장이 원하는 기능과 디자인을 갖춘 제품을 경쟁사보다 빨리 시장에 출시했고 이를 활용한 브랜드 마케팅은 적중했다. '저품질-저가-브랜드가치 악화-판매부진--수익성 악화'라는 악순환 구조는 '소비자 파악-적기 출시-시장선점-프리미엄 유통확보-판매증가-브랜드가치 상승-수익성 향상'이라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었다. 실제로 55인치 프로젝션TV의 미국내 판매가격은 2천5백99달러로 소니(2천2백99달러)보다 비싸다. 오는 8월부터 해외에서 시판될 예정인 무선통신기능을 갖춘 핸드PC '넥시오'의 판매가격은 8백달러선으로 책정됐다. 같은 기능을 갖춘 컴팩의 'i팩3800'은 6백40달러선이다. VCR와 DVD플레이어 기능을 갖춘 'DVD콤보'는 2백99달러로 소니의 DVD플레이어(2백달러)보다 1.5배 가량 비싸지만 60만대 이상 판매되면서 올해 시장점유율 1위를 넘보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 선보인 듀얼 디스플레이 방식의 초경량 휴대폰 판매가격은 3백60달러로 대졸 평균월급(2백70달러)보다 많다. 모토로라 지멘스 등 경쟁사 제품보다 두배 이상 비싸지만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30만대 이상 팔렸다. 세계 40위권의 브랜드 파워=지난해 세계적 브랜드 조사기관인 영국의 인터브랜드사가 발표한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64억달러. 세계 42위다. 99년 31억달러,2000년 52억달러 등 매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 기업으로서는 소니에 이어 2위다. 필립스 파나소닉 등 한때 삼성을 압도했던 기업들을 제쳤다. "브랜드 가치가 연 22% 성장하고 있다.그만큼 더 많은 제품을 팔 수 있다"(오동진 미주총괄법인장) 지난해 삼성전자가 브랜드 이름과 자사제품을 알리기 위해 광고에 지출한 비용은 4억달러. 최악의 불황을 겪으면서도 전년(3억2천만달러)보다 25% 늘렸다. 실제로 마케팅에 투여된 총 금액은 20억달러. 연구개발비와 맞먹는 규모다. 시장과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게 됐다고 김병국 글로벌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밝혔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 ◇특별취재팀=이봉구 산업담당부국장(팀장),강현철,이익원,조주현,김성택,이심기,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