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 학생들까지 대거 의대를 지원하는 모양이다. 의약분업 이후 동네의원이 10.4%나 늘어났다는 것이고 보면 새삼스런 의대 열풍을 이해할 만도 하다. 외환위기 이후 폐업대열에 섰던 의사들이 대부분 재기에 성공했다니 의약분업은 망외의 효과까지 거두고 있다. 병원마다 풍성한 설 보너스를 주었다는 얘기는 듣기에도 즐거운 일이고…. 전국의 수만명 의사선생님들이 머리띠를 매고 길거리로까지 뛰쳐나왔던 2년여 전을 생각하면 역시 의료계는 많은 것을 '싸워서 얻은'셈이다. "싸웠노라 이겼노라"는 카이사르의 말이 히포크라테스의 금언에 더해 모든 병원마다에 내걸릴 지도 모르겠다. 비용은 늘어나고 재정은 고갈되며 항생제는 더욱 남용되는 결과에 이르고 말았지만 정말이지 아름다운 명분으로 시작된 소위 개혁중의 개혁이 바로 이 의약분업이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가 얼마나 다른지,또 목표가 그럴듯하다고 해서 반드시 기대했던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기념비가 되고만 것 또한 의약분업이다. 개혁이라는 단어는 종종 '실리에 대한 명분의 우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명분이 내세우는 목표와 결과가 얼마나 다른지를 웅변하는 또 다른 실례를 들라면 요즘 한창 뜨거운 논란을 부르고 있는 고교평준화 제도를 들 수 있다.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며 한창 자라나는 학생들을 과외지옥에서 해방시키고 평소실력 만으로 입시의 당락을 결정한다는 아름다운 명분이었지만 결과는 설명이 부끄러울 정도의 '교육 부재'에 이르고 말았다. 학교는 과외공부에 모자라는 잠을 보충하는 곳이 됐고 골치아픈 이과는 사절이고 학교가 아닌 학원을 따라 이사를 다니는 이상한 나라의 시대착오로 귀결되고만 것이 오늘의 한국 교육이다. 명분에 대한 집착은 때로 절차까지도 교묘하게 조작하게 된다. 교육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실시해온 대부분 여론조사들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학급에서 1,2등이 아닌 보통의 중학생을 둔 대부분 학부형들은 조건반사적으로 고교평준화를 찬성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의 소위 개혁론자들이 이런 '결과가 뻔한' 여론조사를 평준화 명분의 근거로 삼아왔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다면 여론조사란 때로 억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에 다름 아니게 된다. 1백명,1천명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하더라도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는 90%가 "그렇다"고 응답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입시생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90%의 찬성율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이 두 여론조사의 어느 한쪽을 근거로 일방적인 면학이나 휴식을 강제한다면 이는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의도적인 질문, 예를 들어 "항생제 덜쓰고 의료비는 절약되는 그런 의약분업에 찬성입니까"라고 묻는다면 1백%가 아니라 2백%의 찬성률을 얻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을 터다. 이런 밥통같은 동어반복형 질문으로 정책의 근거를 삼았으니 실패는 불문가지다. 불행히도 이런 종류의 명분 실패사례들이 도처에 넘처나고 있다. '언론사도 탈세를 했다면 세무조사를 받아야 합니까'라는 질문들이나 '기업도 의사결정이 투명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70,80%가 넘는 찬성을 얻었다고 이를 근거로 "옳다구나, 우리는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밥통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기업 개혁이라는 명분은 자주 반기업 정서를 부채질하는 손쉬운 도구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복잡계 경제학'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시오자와 요시노리는 문제의 복잡성을 인식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개혁주의자들이 복잡성은 고사하고 정책의 목표와 그것을 위한 수단을 혼동하는데까지 이르렀다면 상황은 어지간히 심각하다. 개혁명분 과잉이 나라를 엉뚱한 곳으로 몰아가고 있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