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에 들어서면 나는 백지(白紙)가 된다. 생각하는 그대로가 얼굴에 그려지고,감정이 종이보다 더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연속 몇 홀,볼이 안 맞기 시작하자 종달새처럼 떠들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얼굴도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고,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사이로 들려오는 숨소리의 씩씩거림도 심상치 않았다. 순간 동반자 일행도 그 기류를 감지하고 차가워진다. 나 하나의 감정이,동반자와 캐디까지 4명의 분위기를 서늘하게 하는 전파력을 지녔다. 미안해서 수습하려 하지만 쉽게 표현되질 않는다. 그렇게 냉랭하다가 벙커에서 친 샷이 쏙 홀인돼 버디를 잡는 일이 생겼다. 그런 멋진 샷은 처음이었다. 골프장이 떠내려가라 소리소리를 지르고 폴짝폴짝 뛴다. '하이 파이브'를 하고,목소리가 커지고 발걸음도 춤추듯 가볍다. 그 1백80도 뒤엎어짐의 가벼움이라니…. 그래야 1,2타 차이인데 어쩌면 사람이 이리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가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치 먹이를 구하는 짐승처럼 킁킁거리며 남 탓할 '거리'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드라이버샷이 쪼르르르 구르다 만 것은 동반자가 티박스에 올라와 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고,그린 주변 어프로치샷이 토핑난 것은 샷을 하려는 순간 걸어온 그 동반자 때문이고,그 짧은 퍼트를 놓친 것은 볼을 엉성하게 놓아준 캐디 탓이다. 누가 조언을 해주어 잘 치면 내가 잘 한 것이고,잘 안되면 그 조언 탓이다. 도무지 동반자 탓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날씨 탓이나 골프장 설계라도 탓하고 본다. 속으로 남 탓을 실컷 하고 나서는 그 때문에 또 괴로워한다. 몇 타 잘 친다고 상금받을 일도 없고,기록에 남을 일도 없는데 어쩌면 이리도 못되게 구는 것일까 하면서 말이다. 끊임없이 남 탓을 하다가 후회하다가,화내다가 웃다가,토라졌다가 풀었다…. 18홀 내내 드러낸 내 감정이 창피해 욕조 속에서 얼굴을 묻고 나오기 싫을 때가 있다. 골프 때문에 괴롭다고? 그건 늘어난 타수 탓이 아니라 종이보다 가벼운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영분 < 골프스카이닷컴 편집장 moon@golfsk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