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모한 정책실험 ] 우리나라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 으례 '손봐줄' 대상으로 세 집단이 지목된다. 깡패 관료 그리고 대기업(재벌)이 그들이다. 역대 정권마다 세 집단을 손볼 때 지지도가 높아져 그렇다. 깡패는 민생에서, 관료는 민원에서, 재벌은 '상대적 박탈감'에서 국민을 만족시키는 효과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 쿠데타 직후 깡패들을 동원해 제주도에 일명 '5.16 도로'를 닦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삼청교육대는 두말 할 나위도 없고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엔 아예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역대 정권은 '서정쇄신' '부정.부패척결' '공직자 사정' 등 이름만 달리한 채 관료들의 군기잡기에도 나섰다. 그 과정에서 줄대기가 성행했고 관료들이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거나 눈동자만 굴린다는 복지부동(伏地不動) 복지안동(伏地眼動) 등 웃지 못할 신조어가 회자됐다. 개혁 대상이 서민들을 괴롭히는 깡패라면 나름대로 당위성이 있지만 생산.수출.고용의 핵심인 대기업을 겨냥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특히 노태우 정권 이후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으로 축소되면서 정권마다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인기영합식 정책실험을 남발했다. 인기를 의식한 정책으로 우왕좌왕하다 보니 미래 예측이 어려워진 기업들만 혼란스러워졌다. 재계에선 이를 두고 '5년 주기 기업수난사'라고 지칭한다. 1988년 집권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자 90년 대기업의 부동산 소유를 억제하는 '5.8 조치'를 내놓았다. 그러나 과도한 기업 규제로 물가가 뛰고 경기가 추락하자 이듬해엔 '4.4 조치'로 부동산 규제를 대폭 풀고 2백만가구 건설을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80년대말 3저 호황으로 번 과실을 다 까먹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문민 대통령을 자부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강행하고 구 정권의 부패 정치인들을 줄줄이 검찰의 포토라인에 세웠다. 또 박재윤 당시 경제수석 등을 앞세워 이른바 신산업 정책과 업종 전문화를 대기업 정책의 키워드로 제시했다. YS 역시 뒤늦게 규제 완화로 재계에 유화 제스처를 폈으나 경기 급랭과 무역수지 적자 속에 가장 엉망인 상태로 정권을 넘겼다. IMF 체제와 함께 출발한 김대중 대통령은 대기업 정책에 관한 한 YS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기업 개혁은 '5+3 원칙'으로 요약된다. 부채비율 2백%, 상호지보.출자총액 제한, 지배구조 개선 등이 그것이고 YS 시절의 '업종전문화' 정책이 '핵심역량 집중'으로 이름이 바뀐 정도다. 그러나 서슬 퍼런 개혁 조치도 올들어선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작 풀 것과 묶어야 할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 주기가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을 '폴리티컬 이코노미 사이클'이라고 일컫는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10년 20년이 지나도 대기업 정책이 과거의 레퍼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큰 그림 없이 그때 그때 여론을 의식해 죄고 푸는 악순환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도 한국 외환위기의 가장 큰 원인을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라고 지적했다. 이는 대통령 등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부 차원의 국가 경영능력 상실을 꼬집은 것이다. 미국에도 정권 말기엔 레임덕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들처럼 집권초엔 누적된 문제 해결에 집중하다 2∼3년쯤 지나면 현상 유지로 돌아서고 막판엔 힘이 부쳐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같은 '불임(不姙) 정치'를 깨지 않고선 정권 주기와 경기·주가 사이클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오형규 기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