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애 < 건축가 / 서울포럼 대표 > 한국은 디자인 강국이 될 수 있을까? 물론 '될 수 있을까'의 의문은 별 소용이 없다. '어떻게 될 것인가,어떤 방향으로'가 중요할 뿐이다. 부존자원도 별로 없고,핵심 일등상품은 조선 반도체 등 몇가지뿐이고,내수시장은 아무리 커봤자 5천만 시장일 뿐인 한국.풍부하게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한국이 무한정 베팅할 수 있는 분야는 소프트웨어 분야뿐이다.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핵심적인 금융 의료 과학기술 교육 서비스 같은 산업은 워낙 사회 인프라역량과 연관돼 있으므로 일부 특수 전략분야 외에는 급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그 중 끼여들어 짧은 기간 안에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분야라면 '디자인 소프트웨어'라 할 것이다. 눈을 즐겁게 해주고 귀를 즐겁게 해주고,몸을 즐겁게 해주고,시간을 즐겁게 해주는 디자인.'디자인이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다. 사실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나라의 디자인 분야는 놀랍도록 수준이 높아졌다. '아직도 모방 수준'이라 폄하할지도 모르지만 소프트웨어가 모방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서구 지향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이것도 너그럽게 봐준다면 일단 서구에서 발달된 소프트웨어에 익숙해지는 단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른바 다양한 외국물을 먹은 사람들이 느는 것도 작용한다. 직접 나가서 물을 먹었건,관광을 했건,상품 구입을 통해서건,영화를 보건,TV 쇼나 광고를 통해서건 이래저래 외국물을 먹으며 이 것에 물들고 있다. '세계 명품'이라면 '깜박'한다는 한국 사람들의 겉치레가 작용했음도 물론이다. 고급 제품에서는 유럽 계통의 세계 명품 브랜드가 판을 치고,대중적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집중 마케팅으로 공격하는 미국 것이 성행한다. 우리나라에 상점 하나 없는 유명 브랜드 없고,자매지 하나 없는 유명잡지 없다. 상큼한 디자인에, '기찬 프로덕션' 수준에,유명 스타의 이미지를 빌려서 한국 사람의 허영에 어필하는 작전을 쓰고 또 성공하고 있다. 이런 허영에 대한 비판은 사실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디자인의 고급화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허영에 대한 어필이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욕구의 충족이다. 관건은 이렇게 '대중화되는 고급화'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어떤 상품,어떤 브랜드를 개척하느냐가 아닐까. 물론 디자인 상품 개발,디자인 브랜드 개척에 있어 우리나라는 이래저래 그리 쉬운 나라는 아니다. '국가 이미지'가 일천하다. 아직도 '싸구려 생산국'의 이미지도 있다. '친절한 나라' 이미지도 약하다. '서비스 체질이 약하다'고 악평이 나 있기도 하다. 우리는 물론 전통을 강조하지만,전통문화 상황을 담담한 눈으로 판정한다면 우리의 자산은 일본의 깊이나 중국의 너비에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얕고 좁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접어두고라도 세계 시장에서의 상황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살 길은? 한국이 추구할 방향은 무엇일까? '이 시대의 잡종 문화를 즐기는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온갖 디자인,또 시간을 보내는 온갖 놀이에 있어서…. '잡종 문화'라는 말에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서구와 동양,전통과 현대의 혼성이 바로 잡종이 아닌가. 미국과 한국의 대중산업의 혼성,중국 일본 한국의 현대와 전통의 혼성 등 이미 우리의 삶 산업 문화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잡종화 현상이다. 이런 잡종화 현상을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쪽이 훨씬 더 현명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순수성'을 강조하는 문화에 젖어있지만,실제의 현상은 다양한 문화가 다채로운 잡종을 양산하는 문화가 대세다. 만약 우리가 이런 현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면,지금과 같이 세계 문화의 교배가 활발한 시점에 오히려 새로운 문화 리더십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문화 교배의 교두보로서 한국은 '새로운 종의 디자인 강국'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jinaikim@www.seoulforu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