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은 창간 37주년을 맞아 한국 과학기술계의 원로 최형섭 전 과기처장관과 대담을 가졌다. 지난 10일 과학기술회관에서 안현실 전문위원이 그를 만났다. 현재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으로 있는 최 전장관은 빈곤으로부터의 탈피를 모토로 공업화를 추진하던 60년대부터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과학과 산업기술진흥을 강조하면서 관련정책 입안과 추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현재 한국산업은 그 때 뿌려진 과학기술의 씨앗이 그나마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최 전장관은 우리 산업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모방에서 창조로 넘어가야 하며 연구개발과 교육에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대담 = 안현실 전문위원 ] ----------------------------------------------------------------- 안현실 위원 =10월 들어 또 노벨상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면 우리는 언제쯤 노벨상을 받아보나 하는 소외감과 함께 과학계에 대한 아쉬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형섭 고문 =다른 나라에서 상을 받으니까 자꾸 노벨상 얘기를 하는데 열악한 우리 과학현실을 너무 모르는 말씀들입니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초과학보다는 응용과학에 매달려 왔는데 노벨상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이나 됐겠습니까. 그리고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노벨상 얘기 하는 것은 상을 받기 위해 공부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은 그동안 응용과학에만 치중해 온 비중을 기초과학과 어떻게 균형을 맞춰 나아갈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게 급선무입니다. 안 위원 =2대 과기처 장관을 지내시면서 과학기술 입국에 관한 많은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30여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최 고문 =60년대에는 과학이라고 얘기할 만한게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먼저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께 과학교육, 특히 과학을 아는 데서 그치는게 아니라 과학을 하는 교육의 중요성, 기업과 대학을 이어줄 매개체로 정부연구소의 육성, 그리고 일관성과 실천력을 위해 대통령이 진두진휘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원칙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시대가 변하면 내용이 함께 변해야 하는데 그동안은 돈과 기초과학 부재로 제대로 좇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연구개발비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지금부터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인력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고 인재를 찾아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없이는 과거 선진국을 모방하던 후진형 모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안 위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 소장을 지내시면서 정부출연연구소의 산파역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요즘 정부출연연구소는 위기론이 거론될 정도로 심각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최 고문 =확실히 위기입니다. 과학자는 자존심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최초의 출연연구기관인 KIST 설립 당시만 해도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연구의 자율성과 연구인력의 생활안정이었습니다. 연구에만 매달릴 수 있도록 하기위해 당시 국내에는 제도조차 없던 의료보험혜택까지 줬습니다. 그리고 설립 후 3년동안 박 대통령이 매달 한번씩 방문해 사기를 북돋아줬습니다. 지금과 그때의 가장 큰 차이는 처우문제는 둘째 치고 연구의 자율성이 없었졌다는 점입니다. 돈 몇푼 주고 간섭은 무지막지하다면 누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현실에서는 연구보다는 소장이나 원장같은 감투를 더 중요시하는 풍토가 생겨나고 과학계의 모럴해저드가 벌어지게 됩니다. 정부가 제대로 된 프로젝트와 인재를 선택해 과감한 지원을 하되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현재 정부연구소를 옥죄는 옥상옥 행정체제는 어떤 형태로든 개혁돼야 합니다. 안 위원 =정부는 2003년까지 과학예산을 총예산의 5%까지 늘림과 동시에 향후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환경기술(ET) 콘텐츠기술(CT), 여기에다 우주항공(ST)까지 포함, 집중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제대로 하는 것입니까. 최 고문 =이들 분야를 선택하기 전에 우리의 기초과학 현주소에 대해 세밀한 검토가 이뤄졌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BT의 경우 핵심과학은 기초생물과학입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은 연구인력과 노하우를 가진 나라는 그동안 기초과학분야에 엄청난 투자를 쏟아부은 미국입니다. 우리는 지난 30여년동안 기초과학에 대한 제대로 된 투자조차 이뤄지지 않은 실정인데 이런 미국과 경쟁하겠다고 덤벼드는게 과연 승산이 있겠는냐 하는 것입니다. NT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노는 재료의 세밀한 한 분야로 산업을 뒷받침하는 기반기술이지 기업의 주력산업일 수가 없습니다. 조금 투입해 가지고는 효과도 못 볼 위험이 있습니다. 稚뺙?재원이 소요되는 ST도 투자의 임계규모 측면에서 가능한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우수한 두뇌로 승부할 수 있는 IT분야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과 같은 IT벤처도 중요하지만 굴뚝산업의 IT화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선진국에서도 그렇지만 근래에 와서 '굴뚝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대기업들이 집중적인 IT 투자를 통해 기존 산업의 인터넷화에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런 전환이 보다 본격적이고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광양제철이 세계 철강업체에서 가장 높은 효율성을 올리는 것도 바로 IT화 때문이지요. 안 위원 =현재의 과기부 과학예산 운영에 있어 기초과학과 응용과학, 신산업과 전통산업의 비중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오랜 과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 고문 =현재 우리는 응용과학분야에 예산의 70%를 투자하고 있습니다. 과학 선진화를 위해서는 앞으로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따라서 5년 내에 기초과학의 비중을 40%선까지 끌어올리고 10년 안에 동등한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봅니다. 신산업과 전통산업의 균형은 과거 일본의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70%가 제철, 제강, 중기, 조선 등의 전통산업이었고 첨단산업의 비중은 30%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굴뚝산업을 무시한 신산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디지털혁명의 주도권을 두고 전통산업과 신산업이 다투는 방향으로 몰아가기보다 기존 굴뚝산업의 고급화와 IT화, 일류화를 통해 두 산업을 접목시켜 서로가 양립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안 위원 =대학졸업인력의 재교육비가 더 들어가는 등 연구인력의 질적 저하에 대한 산업현장의 불만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현재 우리의 연구인력배출의 문제가 무엇이라 생각시는지요. 최 고문 =연구인력, 특히 고급인력은 질이 중요합니다. 중등과정에서는 인성교육이 이뤄지고 대학에서는 창의력을 부여하는 맨투맨식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공부를 합니다. 게다가 대학은 학생을 인적자원으로 보기보다는 돈벌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투자에 인색합니다. 교수 1인당 학생이 채 4명이 안되는 선진국 유명 공대에 비해 서울공대만 해도 33명이나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창의력을 갖춘 인재들이 나오겠습니까. 교수진에 대한 투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인력을 막론하고 노벨상 수상자급 교수진을 초빙해 와야 합니다. 축구 감독은 엄청난 돈을 주고 해외인력을 데려오면서 왜 여기에는 투자를 아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안 위원 =벤처붐이 대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창업 때문에 순수연구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지적까지 일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 고문 =대학은 지식의 근원이 되어야지 돈벌이의 대상이 돼서는 안됩니다. 미국에서 벤처붐으로 인해 지식공급의 원천인 스탠퍼드 대학이 흔들렸습니까. 창업에 뜻이 있다면 대학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대학에 남아 돈벌이에 나서면 학문의 전당인 캠퍼스 안에 일대 혼란이 생깁니다. 안 위원 =최근 신기술, 신산업의 주도권을 두고 부처간 다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요. 최 고문 =부처간의 영역싸움을 부처간의 협의로 조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조정기능을 강화해야 합니다. 우선순위, 부처할당, 중복검토 등에 대한 평가위원회를 구성, 활용하고 과기부는 부처간 이해다툼에서 벗어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개편돼야 합니다. 안 위원 =대통령이 현재의 우리 경제를 중대국면이라고 진단할 정도로 국내외 안팎으로 여러 악재가 쌓여 있습니다. 세계경기침체와 테러여파로 수출과 내수가 급격히 위축되는 등 우리경제의 주름살이 깊어지는데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요. 최 고문 =한 국가가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다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경쟁력의 원천이 국가내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 원천을 구성하는 요소가 여러가지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사회윤리의 확립과 자주기술개발력이 중요합니다. 질서 속에 자유가 있다는 말이 있듯 모두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성실함과 남들보다 애쓰는 인내력, 그리고 남을 걱정하는 희생정신을 가질 때 사회윤리가 바로 섭니다. 또 우리나라 같은 자원빈국에서는 자주기술 개발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래의 인재인 청소년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GE의 전 회장인 잭 웰치가 "모두들 어려워할 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고 말한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 위원 =최근 중국이 빠른 속도로 세계의 공장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제조업분야에 이어 첨단분야에서도 중국의 거센 도전을 받으면서 향후 국내 제조업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최 고문 =중국에 경쟁력이 뒤져 넘어가는 제조업과 산업분야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합니다. 대신 우리는 기술과 두뇌집약적인 산업으로 승부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 노르웨이 등 충분히 성공사례가 있습니니다. 과거처럼 연구따로 생산따로가 아니라 연구소가 곧 생산공장이 되는 기업토대를 만들어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산업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정리=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 [ 최형섭 前 과기처 장관 약력 ] 1920년 경남 진주 출신 44년 일본 와세대 대학 이공학부 졸업 58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원 졸업(공학) 62~66년 원자력연구소 소장 66~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 71년 6월~78년 12월 과학기술처 장관 76년~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77년 5월~80년 8월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87년~현재 포항산업과학연구원 고문 88~92년 UN 과학기술개발자문연구위원회 위원 91~93년 국가과학기술잠누회의 위원 96~99년 한국과학기술단체종연합회 회장 96년~현재 충남대 석좌교수 주요저서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개발전략'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과학기술에는 국경이 없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