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한가위] 콩트 : '선애씨는 지금 고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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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이순원 >
약력=1957년 강릉 출생.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주요작품 "그 여름의 꽃게""말을 찾아서""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아들과 함께 걷는 길""19세""그대 정동진에 가면""순수"등.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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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는 아까부터 밀렸다.
아니,고속도로만 밀린 게 아니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서기 위한 진입로 또한 아침부터 거대한 주차장처럼 앞차,뒤차가 엉켜 요지부동이었다.
핸들은 선애씨의 남편이 잡고 있다.
목적지인 강릉까지는 2백30km.
이런 식이면 언제 닿을지도 막막하다.
제법 어깨가 굵어져 이젠 아빠 어깨만해진 큰 아이와 엄마 어깨만한 작은 아이가 뒷자리에 앉아 있다.
몇해 전에도 추석이면 늘 이 길 위에 올랐다.
그땐 친정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남편의 형님(그래,바른 표현은 시아주버님이겠다)이 온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어머니도 따라가셨다.
다음해 추석이 되었을 때 남편이 말했다.
나야말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같군.
그래서 지난해부터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친정에 며칠 가 보랴 하는 생각으로 선애 씨도 그렇게 말하고,남편도 선선히 처가로 가는,이 길고도 긴 귀성 대열에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조금만 더 가서 신갈에서 강릉 쪽으로 갈라지는 길로 들어서면 안 막힐 거예요.예전에는 계속 부산까지 내려갔으니까 더 막혔지"
"정말 왜 다들 이렇게 명절이면 고향으로 가는 거야?"
그런 식으로 다시 신갈까지 엉금엉금 기어 왔을 때 이미 몇 시간이 더 흘러가고 말았다.
그런데,아까부터 선애 씨 머리 속에 들어온 다음 나갈 줄 모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머릿속이 아니었다.
얼핏 길 위에서 저쪽 자동차 안에 있는 어떤 남자의 옆모습을 보았던 건데,그 모습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창욱이 오빠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선애는 왠지 그 남자가 창욱이 오빠 같다고 생각했다.
고향 마을 고래등 같은 옛날 기와집의 둘째 아들.
처음 서울로 올라올 때 그 오빠와 동행했다.
선애 씨가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가을의 일이었다.
그해 추석에 집으로 내려온 아랫말 명자 언니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 편지를 했던 것이다.
자기가 다니는 공장에 일자리도 있고,일손도 필요하니 지금 올라오면 되겠다는 편지였다.
처음 서울로 가는 그 버스에 재집 둘째 아들 창욱이 오빠하고 같이 탔었다.
봄만 되면 "무작정 상경 소녀"라는 말이 신문에 실리고,때로는 그게 사회적으로 문제화되기도 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봄이 아닌 가을에 그렇게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르고 보니 저쪽에 창욱이 오빠가 앉아 있던 것이었다.
그때 창욱이 오빠는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랬었다.
"야,선애,너도 서울로 가냐?"
선애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날 버스 안에서 창욱이 오빠는 좋은 말을 참 많이도 해주었다.
서울로 올라가면 시골에서 다 하지 못한 공부를 하라는 말도 해주었다.
산업체 부설학교 얘기도 서울로 가는 그 버스 안에서 창욱이 오빠로부터 듣고,실제로 이듬해 선애는 그렇게 서울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었다.
아,생각난다.
어느 해 추석엔 그런 일도 있었다.
고향으로 떠나기 전날 교실에서 선생님이 말했다.
모두들 고향에 갔다 올라올 때 자기 마을에서 잔디 한 장씩을 떠오라고.
그것을 학교 운동장 가에 깔았는데,사람들은 그것을 팔도 잔디라고 불렀다.
벌써 20년도 넘는 세월 저편의 이야기다.
선애 씨는 또 하나의 일을 추억한다.
지금은 예전에 자신이 다니던 그 공장들이 다 다른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열일곱 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 다닌 공장이 방직 공장이었다.
세 개의 베틀 사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옷감을 짰다.
제일 처음에 짠 것은 하얀 소청이었다.
다음해 추석,고향으로 내려올 때,어머니께 드릴 전기밥통과 그 소청을 한 박스 준비했었다.
어머니가 그걸 마을 집집마다 나누어 주었다.
우리 딸이 서울에 가서 짠 것이라고.
집집마다 아이를 낳으면 그걸로 기저귀감을 하라고.
지금도 선애 씨는 어디에서 그런 눈이 부시도록 하얀 소청을 보면 어김없이 옛생각에 접어든다.
"맞아.바로 그해였어"
옆 자리에서 선애 씨가 혼잣말을 한 소리를 듣고 바로 남편이 묻는다.
"뭐가 그해라고?"
그 말에 선애 씨는 화들짝 놀란다.
"아뇨.몇 년 전 우리가 마지막으로 부산 가던 해에도 이렇게 자동차가 막혔다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선애 씨는 다시 추억 속에 젖어든다.
산업체 부설학교 운동장에 깔 그 팔도 잔디를 뚝방길에서 뜨던 날,서툰 삽질을 하고 있을 때 저쪽 뚝방길에서 걸어오던 창욱이 오빠가 대신 삽을 잡고 그것을 떠주었다.
그리고 말했던 것이다.
"선애야.어디 가서든 이 잔디처럼 살아라.모래밭에서도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흙밭에서도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아마 학교에서도 그래서 다들 고향 잔디를 떠오라고 했을 거다"
정말 그 잔디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남편을 만난 건 그로부터 썩 후의 일이었다.
이제 이게 내 삶의 깊은 뿌리였으면 하고,그때로서는 드물게 자동차 일급 정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남편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아까 본 게 정말 창욱이 오빠라면,그 오빠네도 지금 추석을 쇠러 고향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보"
이제 아까처럼 막히지 않는 길에서 선애 씨가 남편을 부른다.
"당신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석만 되면 왜 고향에 내려간다고 생각해요?"
"고향이니까 내려가지.자기 뿌리를 찾아서"
"아뇨.나는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아니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내 생각엔 다들 자기가 사는 자리에서 새롭게 내린 뿌리를 고향으로 가는 길 위에서나 고향에 가서 다시 뒤돌아보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왠지 그렇게 말하는 선애 씨의 목소리까지 조금은 젖어 있는 듯하다.
"이 사람,고향으로 가더니 시인이 되어 가는군"
그래.
이제 길은 뚫렸다.
선애씨처럼 우리는 지금 모두 고향으로 간다.
그곳에 두고온 어린날의 뿌리를 찾아,또 지금 저마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내린 저 굵고도 단단한 우리 삶의 뿌리를 다시 생각하며.
고향 마당에서 보는 달은 서울에서 보는 달과는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