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北村가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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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천도 직후인 1395년 1월 조정의 고위 관리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도의 새 주민이 될 사람들에게 그 신분에 맞추어 집터를 나누어 주었다.
궁궐이 가깝고 예부터 주거에 최길지(最吉地)라는 지금의 가회동 삼청동 사간동 안국동 계동 소격동 일대에 권문세가가 들어서 북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실은 이무렵부터다.
양반의 자손이긴 하나 몰락한 사람들이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남산골 샌님''남산골 딸깍발이'라 놀림을 받았던 선비들은 남산기슭인 남촌에 모여 살았다.
오늘날의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지역이다.
북촌이니 남촌이니 하는 주거지의 지역분화 현상은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북촌 남촌외에도 낙산 근처를 동촌,서소문 안팎을 서촌,수표교 인근을 중촌,한강변을 5강(五江)으로 불렀고 각 지역에 따라 주민의 신분이나 생업이 달랐다.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 장수이고,이마가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수'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지금의 청진동 일대엔 역관 의관 등 중인출신의 관리(아전)들이 살았고 당주동 적선동 내자동 일대에는 궁궐과 육조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종로와 을지로에는 상가와 시장이 형성돼 상인들이,한강변에는 뱃사람과 장사꾼들이 살았다.
일제 때 북촌에는 한국인,남촌에는 일본인이 거주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가회동 계동 등 북촌의 한옥 밀집지역을 역사문화미관지구로 가꾸려 했던 서울시의 계획이 겉돌고 있다고 한다.
소유주들이 재산권 행사에 불이익을 당할까봐 등록조차 않는가 하면 집값이 오르고 사들이려 해도 매물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83년 전통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됐다가 91년 해제될 때까지 건축규제에 시달리고 재산권행사에서도 큰 피해를 봤던 터라 주차장이나 내주고 수리비 일부를 보조한다고 해서 호락호락 등록에 응할 것같지는 않다.
나날이 줄어가는 북촌의 한옥을 그나마 보존하려면 소유주에게 더 큰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을 다시 내놓아야 할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