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어음을 퇴출시키고 있다''

기업이 상거래 때 발행해온 어음이 올들어 크게 줄고 있는데 대해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어음 퇴조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시장의 힘이다.

기업간(B2B) 전자상거래가 확산되면서 어음이란 종이 쪽지는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됐다.

게다가 은행들이 기업 결제라는 새로운 틈새시장을 공략하면서 어음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이 특별법 제정까지 검토하며 없애려 했던 어음이 경제 환경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무대 뒤로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 시장에서 퇴출 =어음이 사라지고 있는 요인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전자상거래의 확산이다.

기업들이 인터넷을 통해 물품을 사는 사례가 늘면서 결제 방식도 전자화되고 있는 것.

대표적인게 전자방식 외상매출채권담보대출(외담대).

올 2월부터 도입된 전자방식 외담대 잔액은 지난달말 현재 2천9백40억원에 달했다.

매출채권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대출받는 이 상품은 모든 절차가 인터넷으로 이뤄진다.

당연히 어음은 필요 없다.

금융결제원은 이르면 올 10월부터 B2B거래 때 대금 결제를 은행 공동망을 통해 온라인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할 예정이어서 어음 퇴출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은행의 적극적인 대체상품 판매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은행들은 작년 5월부터 기업구매자금 대출을 시작했다.

한은의 자금 지원 등 ''당근''도 받을 수 있어 은행들은 앞다퉈 이를 취급했다.

은행 입장에선 어음 할인을 해줄 때보다 어음보관 비용 등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구매자금대출을 통한 현금결제액이 어음결제액을 초과한 0.5%에 대해 법인세 공제까지 받을 수 있어 이를 선호하고 있다.

◇ 낮아진 연쇄부도 위험 =어음 결제가 감소하면서 한 기업의 부도가 다른 기업으로 이어지는 현상이 줄어드는 등 어음의 폐해도 적어질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은 보통 어음에 ''배서(背書)''를 해 다른 기업에 돌리기 때문에 한번 부도가 나면 거래하는 여러 업체가 줄줄이 쓰러지곤 했었다.

정부가 어음제도를 없애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기업 구매자금대출이나 전자방식 외담대의 경우 구매기업과 판매기업간 1대 1 거래이기 때문에 이런 연쇄 피해를 막을 수 있다.

하나은행 전주용 과장은 "어음 발행이 줄면 기업의 부도 리스크도 감소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은행도 어음 할인보다 구매자금 대출금을 회수하는게 훨씬 쉽다"고 말했다.

작년 6월부터 구매자금대출로 1천여개 거래업체에 모두 현금 결제를 해주는 동원F&B의 한 관계자는 "거래업체의 현금 유동성이 좋아져 원부자재 공급이 안정된 것도 부대 효과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 더 줄이려면 =기업들은 구매자금대출 등이 더욱 활성화되려면 제도적 뒷받침이 긴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구매자금대출을 동일인 여신한도에서 예외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동일인 여신한도에 걸려 구매자금대출을 쓰고 싶어도 못 쓴다고 밝히고 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신 한도에 잡히지 않는 어음을 발행한다는 얘기다.

내년 3월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구매자금대출에 대한 법인세 공제혜택도 더 연장돼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한국에만 있는 전근대적인 결제 수단인 어음을 없애기 위해선 구매자금대출에 대한 법인세 혜택 등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