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 김영사 사장 pearl@gimmyoung.com >

경기도 교외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어느 분이 전화를 했다.

오늘 약속을 내일로 미루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인즉슨 자기 집 앞의 산에 취해 도저히 오늘은 움직일 수가 없단다.

우연히 마당에 나왔다가 앞산을 보게 되었는데 산에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섞여 가지가지 연하고 여린 파스텔 색을 길어 올리는 게 어찌 그리 예쁘고 가슴 뭉클한지,한참 넋 놓고 있다가 아예 의자까지 갖다놓고 앉아서 보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분은 말했다.

"초봄은 짧잖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저 산의 저런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겠어요.

나 오늘 내친김에 날 잡을래요"

해마다 봄이 되면 산에는 색의 마술이 일어난다.

하얗게 터지는 산벚꽃,선홍색 철쭉과 진달래,연분홍 산살구꽃,노란 산수유….

나뭇잎은 또 얼마나 천차만별로 색을 피워 올리는가.

베이지 갈색연두에서 노랑연두 진초록 뽀얀연두까지 수많은 색의 그라데이션이 일어난다.

초록이 저렇게 여러 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게 신기하다.

5월의 신록이나 한 여름의 짙푸른 녹음에서는 볼 수 없는 4월 초봄만의 다양한 색깔이다.

그래서 4월에는 산을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저 산 어디쯤에는 무슨 나무가 있고 저 골짜기에는 어떤 나무가 무리 지어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얗게 피어있는 게 싸리꽃인지 복숭아꽃인지, 저 노란 꽃무더기가 개나리인지 산수유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색과 분위기와 결로 우리에게 미시의 눈을 열어준다.

그렇다.

산은 그냥 한 덩어리의 초록이 아니다.

그 속에는 서로 다른 생명들의 각기 다른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자연이 그렇거늘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단하고 신비로운 생명체라는 인간을 자기의 편견대로 바라보고 규정해버리지는 않았는가.

부모는 자녀를,남편은 아내를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절망하거나 화내고 있지는 않는가.

4월의 산은 곧 5월의 녹음 속에 숨어버릴 것이다.

늦기 전에 살펴보자.

내 주변의 사람들 중 혹 내가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은 없는지,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