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섰거라"라고.
도둑이 뒤돌아보며 응답했다.
"너라면 서겠냐".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우스갯소리다.
그러나 주위를 되돌아보면 실익도 없이 "게 섰거라" 소리만 요란한 꼴이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명분이 좋더라도, 이를 받아들여야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은 채 밀어붙여서는 곤란하다.
도둑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너라면 서겠냐"고 소리칠 수나 있지, 선량하고 소심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명분에 압도돼 말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꼴이 없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른바 자금세탁방지제도라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률''과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둘러싼 논란도 그런 점에서 생각해볼 점이 있다.
마약밀수 뇌물 등 ''중대범죄''와 관련된 혐의가 있는 금융거래정보만 은행원들이 금융거래정보원에 보고토록 의무화, 계좌추적해 처벌토록 돼있던 정부안에 대해 왜 정치자금과 탈세는 제외하느냐는 시민단체의 반론이 제기되고, 그래서 정치자금을 포함시키기로 여야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정치적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자금의 경우 계좌추적을 본인에게 통보해 주자는 주장이 나오는 등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는게 저간의 사정이다.
정치자금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명분이 분명하다.
만약 정치자금은 제외하고 국회를 통과했다면 시민단체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마도 다음번 총선에서 재경위와 법사위 위원장이나 여야 간사들은 낙선운동의 표적이 됐을지도 모른다.
정치자금을 포함시키되 계좌추적을 본인에게 통보해 주자는 야당쪽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계좌추적 통보를 받은 정치인이 해당은행과 은행원에게 펄펄 뛸 것 또한 불을 보듯 명확하다.
은행원 해먹기도 참 힘든 나라가 될 것은 자명하다.
정치자금을 자금세탁방지법 규제대상에 넣느냐 마느냐는 문제는 명분이나 야당탄압 등에 악용될 가능성 등을 따지기에 앞서 은행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정의라는 차원에서 자금세탁방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이 모아졌다 하더라도 은행원들에게 줄 부담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미 검증된 정도로 그치도록 하는 것이 현실감이 있다.
이 제도 도입을 권고하고 있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FATF(자금세탁방지대책기구)도 정치자금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은 참고할만 하다.
마약 밀수 해외재산도피 뇌물 등의 범죄혐의가 있는 돈과 정치자금은 그 성격이 판이하다는 점도 은행원들에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규모에 관계없이 정치자금법의 절차와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불법이 아니라는 점만 감안하더라도 그러하다.
지명도가 높아 몰랐다고 하기도 어려운 정치인의 일정규모(대통령령으로 정하기로 돼있다) 이상 금융거래를 불법재산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신고해야 한다면 당사자인 은행원의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자금의 폐해가 우리나라 못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일본의 경우에도 자금세탁방지법 대상에 정치자금을 넣지 않았다.
"실명제는 좋지만 예금경쟁이 치열하고, 그래서 은행원들이 일어서서 인사하며 고객을 맞아야 하는 현실에서는 이르지 않은가"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제기되지도 않았던 문제가 금융실명제의 큰 쟁점이었던 일본인들 다운 결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자금세탁방지법 논란이 정치자금을 대상에 포함하느냐 마느냐로 시종하고 있는건 문제다.
우리나라가 불법자금의 천국이 아니라는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법제정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그러하다.
새 제도로 우선 우려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금자 비밀보호제도의 형해화다.
영장없이도 계좌추적이 가능한 새 제도의 충격을 극소화할 실행방안을 마련해야 할텐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새 법의 규제대상에 정치자금 탈세 등을 추가하기만 하면 사회정의가 크게 고양되는 양 착각하고 열올릴 때가 아니다.
"게 섰거라"라고 목청만 높이는 꼴을 연출하지 말아야할 것은 물론이다.
/본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