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거품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해 초 "벤처"라는 간판을 내세운 기업인들은 투자자들에게 액면가의 50배, 1백배를 조건으로 내세우곤 했다.

하지만 하반기들어 코스닥이 주저앉고 투자 열기가 식으면서 운영자금조차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벤처기업이 크게 늘고 위기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올들어 벤처투자 분위기가 되살아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일단 투자배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또 "벤처=인터넷"이라는 등식이 지배하던 지난해와는 달리 "벤처=기업가 정신"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벤처투자패턴이 보다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벤처캐피털들도 검증받지 않은 사업계획서보다는 벤처기업을 이끄는 경영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꼽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내 주요 벤처캐피털에서 벤처투자를 책임지고 있는 7명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로부터 올들어 달라진 벤처투자 패턴과 최근 동향에 대해 들어봤다.

<> 투자상담건수 =지난해와 비교해 수적으로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고 이들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업종별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벤처투자 열풍을 주도했던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은 현저히 줄었다.

대신 IMT-2000이나 디지털TV 관련 업체 등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벤처기업들의 상담 건수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안재홍 한국IT벤처투자 대표는 "인터넷 분야에서 단순하게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거나 제조업이더라도 기술력이나 시장성이 어느정도 검증되지 않은 업체들의 투자문의는 많이 줄고 있다"며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이른바 대박 가능성보다는 조그만 수익이라도 실제로 올리고 있는 업체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조용우 KTB네트워크 이사는 "코스닥에 등록돼 성공한 1세대 벤처기업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새로 기업을 차리는 경우가 늘고 있는게 특징"이라고 최근 동향을 전했다.

<> 투자배수 =더 이상 수십배씩을 요구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지난해 초에 비해 절반 수준에서 투자조건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고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입을 모았다.

양종하 한국기술투자 전무는 "지난해 여름 이후 기업들의 가치가 많이 낮아져 작년에 평균 10억원이었던 투자금액이 현재는 5억원 내외로 작아졌다"며 "지난해 초반의 투자배수를 10이라고 한다면 작년 하반기는 7, 올해 초는 5 정도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전반적으로 투자재원이 풍부하지 않아 협상과정에서 다른 투자자들이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며 끼어드는 경우도 거의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채현석 TG벤처 상무는 "현재 투자배수는 지난해초 대비 3분의 1 수준"이라고 전했다.

안재홍 대표는 "코스닥에서 시가총액이 줄어든 만큼 투자 배수도 낮아졌다고 보면 된다"며 "최근엔 지난해에 비해 10분의 1 수준에서 투자를 요청하는 기업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성만경 무한기술투자 상무는 "매출이 미미한 기업의 경우는 액면가에 근접한 수준으로 투자배수가 결정되고 있다"며 "벤처투자시장이 수요자(벤처기업) 중심에서 공급자(벤처캐피털)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 투자 포인트 및 업종 =벤처기업들이 들고 오는 사업계획서 수준이 많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사업계획을 낙관적으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고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에따라 벤처캐피털들은 수익성과 함께 대표이사의 도덕성, 경력,성실성 및 투자자금의 운용계획을 꼼꼼히 따지고 있다.

전대엽 아주기술투자 이사는 "대부분 벤처캐피털들이 경영자의 도덕성을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다.

주요 투자 업종으로는 무선인터넷 광통신 바이오 환경 등을 꼽았다.

김재봉 산은캐피탈 이사는 "지금이 좋은 업체들을 골라서 싼 가격에 투자할 수 있는 적기"라며 "네트워크 장비, 부품.소재, 엔터테인먼트 등을 관심있게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장경영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