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속의 첨단과학] (17) '봉수대'..무선통신 '디지털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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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외적이 변방으로 침입하면 이 소식을 어떻게 서울에 알렸을까.
남산에 올라보면 굴뚝과 아궁이가 함께 붙어있는 5개의 연조(화두)를 볼 수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에 봉수 신호를 주고 받았던 봉수대 유적으로 당시에는 이곳에 신호를 보내 국경지대나 변방의 외적 침입 사실을 서울에 알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 봉수는 밤에는 횃불(봉·熢)로,낮에는 연기(수·燧)로 신호를 전달하는 통신 시스템으로서 군사의 이동 사항이나 적의 침입에 대한 정치·군사 정보를 통치자인 임금에게 전해주는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봉수의 신호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했는 데 약정된 신호 규정에 근거,횃불이나 연기를 올리는 방식에 따라 신호의 내용을 결정했던 이른바 디지털 통신 방식이었다.
우리 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행됐던 것으로 보이는 데 조선시대 세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비됐다.
세종은 고려와 당나라의 봉수제도를 참고해 봉수를 4거(四炬)에서 5거로 세분했으며 전국을 1로(路)에서 5로로 나누어 5개의 봉수망을 운영했다.
4거란 평시는 봉수 하나,변방이 위급한 상황에는 둘,적의 침입으로 전투가 임박했을 시에는 셋,적과 접전이 벌어졌을 시에는 넷으로 신호를 구분했던 규정을 말한다.
세종은 전국적으로 6백43개소에 봉수대를 설치했으며 봉수대와 그것의 운영에 필요한 군사의 운용에 관해서는 경국대전의 봉수조 규정을 적용했다.
봉수의 전달 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 내지를 거쳐 서울 남산의 경봉수(京烽燧)에 이르는 중앙 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변방으로 내보내는 분산식으로도 운영됐다.
봉수대는 신호를 보내기 적합하도록 시야가 탁 트인 산꼭대기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인 데 대개 봉수대 사이에 10㎞ 정도 거리를 두었다.
수원 화성에는 봉돈이라는 봉수대가 성곽에 설치되어 있는 데 굴뚝(화두)간의 간격을 3∼4m정도로 해 10㎞밖에서도 5가지 신호를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변방에서 보내는 신호는 서울의 경봉수까지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함경도나 평안도 변방에서 오후에 봉화를 올리면 해질 무렵에 경봉수에서 가장 가까운 아차산에 도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달 속도는 대략 1시간에 1백㎞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적으로 12시간이면 어느 곳에서나 당일로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남문현 건국대 박물관장
남산에 올라보면 굴뚝과 아궁이가 함께 붙어있는 5개의 연조(화두)를 볼 수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에 봉수 신호를 주고 받았던 봉수대 유적으로 당시에는 이곳에 신호를 보내 국경지대나 변방의 외적 침입 사실을 서울에 알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 봉수는 밤에는 횃불(봉·熢)로,낮에는 연기(수·燧)로 신호를 전달하는 통신 시스템으로서 군사의 이동 사항이나 적의 침입에 대한 정치·군사 정보를 통치자인 임금에게 전해주는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봉수의 신호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했는 데 약정된 신호 규정에 근거,횃불이나 연기를 올리는 방식에 따라 신호의 내용을 결정했던 이른바 디지털 통신 방식이었다.
우리 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행됐던 것으로 보이는 데 조선시대 세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비됐다.
세종은 고려와 당나라의 봉수제도를 참고해 봉수를 4거(四炬)에서 5거로 세분했으며 전국을 1로(路)에서 5로로 나누어 5개의 봉수망을 운영했다.
4거란 평시는 봉수 하나,변방이 위급한 상황에는 둘,적의 침입으로 전투가 임박했을 시에는 셋,적과 접전이 벌어졌을 시에는 넷으로 신호를 구분했던 규정을 말한다.
세종은 전국적으로 6백43개소에 봉수대를 설치했으며 봉수대와 그것의 운영에 필요한 군사의 운용에 관해서는 경국대전의 봉수조 규정을 적용했다.
봉수의 전달 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 내지를 거쳐 서울 남산의 경봉수(京烽燧)에 이르는 중앙 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변방으로 내보내는 분산식으로도 운영됐다.
봉수대는 신호를 보내기 적합하도록 시야가 탁 트인 산꼭대기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인 데 대개 봉수대 사이에 10㎞ 정도 거리를 두었다.
수원 화성에는 봉돈이라는 봉수대가 성곽에 설치되어 있는 데 굴뚝(화두)간의 간격을 3∼4m정도로 해 10㎞밖에서도 5가지 신호를 구분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변방에서 보내는 신호는 서울의 경봉수까지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함경도나 평안도 변방에서 오후에 봉화를 올리면 해질 무렵에 경봉수에서 가장 가까운 아차산에 도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달 속도는 대략 1시간에 1백㎞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적으로 12시간이면 어느 곳에서나 당일로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남문현 건국대 박물관장